[여주 시민의날]여주와 세종대왕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를 모신 여주 영릉

[아시아경제(여주)=이영규 기자] 여주는 조선 초기 '여흥'이라는 지명으로 불리던 곳으로 여흥 민씨의 관향이었다. 여주의 상류에는 오랜 세월 남한강의 물줄기를 순화시키며 여주를 지켜낸 마암이라는 바위가 있고, 마암 아래 굴속에서 여흥 민씨의 시조인 '민칭도'가 태어났다고 한다. 민칭도의 11세손인 문도공 민제(閔霽)의 둘째딸이 바로 조선 3대 임금 태종의 비이자 세종대왕의 어머니인 원경왕후다.  1401년(태종 1년) 여흥군은 여흥부로 승격됐는데, 원경왕후의 내향이라는 이유로 격이 한 단계 높아졌다고 한다. 내향은 왕비의 친정이 있는 고장을 말한다. 이후 여주는 여흥 민씨의 세거지이자 세종대왕의 외가가 있는 지역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세종대왕은 임금이 되기 전과 후 모두 3차례 강무(講武)를 위해 어머니가 태어난 여주를 찾았다. 강무는 군사의 조련과 사냥을 겸한 무예연습이다. 세종대왕의 첫 여주 방문은 임금이 되기 1년 전인 1417년 아버지 태종 임금과 함께였다. 여주 이포를 찾은 세종대왕은 강무에 매진했다. 이후 두 차례의 강무는 세종대왕이 임금이 된 뒤 이뤄졌다. 현 북내면 금당천과 여주시청 건너편 강변에 자리한 팔대숲이 세종대왕이 당시 강무에 매진했던 곳이다. 이 곳에는 청심루라는 누각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광해군 때 여주목사 김용이 중건한 뒤 그의 문집에 '청심루는 일찍이 세종대왕께서 행차하였던 곳'이라는 기록을 남겨놓으면서 후세에 전해오고 있다. 여주와 세종대왕의 인연은 예종1년(1469년) 서울 헌인릉에 모셔졌던 세종대왕릉(영릉)이 옮겨오면서 마침표를 찍었다. 이후 남한강변의 천년 고찰 신륵사는 세종대왕의 원찰(願刹)이 되면서 그 이름이 더욱 알려졌다. 원찰은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진 사찰이다. 신륵사 경내 불전이 여느 사찰과 달리 대웅전이 아닌 죽은 이의 극락왕생을 비는 극락보전으로 돼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주에는 세종대왕의 누이 경안공주도 영면해 있다. 여주 점동면 덕평리에 위치한 제간공 권규의 묘역에는 경안공주도 함께 있다. 태종과 원경황후 사이에는 태어난 셋째 딸이 경안공주다.이영규 기자 fortune@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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