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다라기자
1983년 기흥 반도체 사업장을 점검하고 있는 고 이병철 선대 회장
[아시아경제 원다라 기자] "삼성 반도체? 영업손실만 내는데 아닙니까?" 2017년 매출 15조6600억원과 영업이익 6조3100억원을 달성한 삼성의 반도체 사업도 시작은 녹록치 않았다. 백지상태에서 연구를 시작했던 삼성 반도체 연구원들은 마이크론으로부터 기술력을 배우고자 했지만 어렵사리 얻은 설계도면을 독학해야 할 정도로 경계심 어린 텃세에 맞닥뜨리기 일쑤였다.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후 얼마간은 손실만 내는 '미운 오리'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일부 직원들은 삼성 반도체로 발령이 나면 퇴사를 고려할 정도였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반도체 사업 초기만해도 '불가능한 일을 해낼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내·외부에서 있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신화를 가능케 한 '도쿄 구상'=이병철 삼성그룹 선대 회장이 반도체 산업 진출을 결심했던 1983년 한국은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주위의 냉소에도 불구하고 이병철 선대 회장은 "앞으로 한국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산업은 반도체밖에 없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당시 한 신문 기고에서 "저가품 대량 수출에 의한 국력 신장은 한계에 이르렀다. 삼성은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반도체 사업을 추진키로 했다"고 반도체 진출 이유를 역설했다.이보다 한 달 전인 2월8일 이 선대 회장은 일본에서 그룹 차원의 반도체 사업 진출을 결심했다. 당시 일본 미쓰비시연구소는 삼성 반도체가 실패할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낼 정도로 주위의 시각은 부정적이었다. 삼성은 마이크론과 64K D램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했지만 마이크론은 기술이전에 소극적이었다. 관련 기술자들은 연구소 대신 인근 모텔에서 설계도면을 바탕으로 사실상 '독학'해야 했다. 결국 독자 개발하기로 한 삼성은 309가지 반도체 공정 프로세스를 6개월 만에 독자기술로 습득하는 성과를 거뒀다.◆반도체 신화, 두 번의 위기=기술력을 갖췄지만 삼성이 메모리 반도체 개발을 마치고 본격 수출하기 시작했던 1984년 메모리시장에는 불황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었다. 1984년 4달러 수준이던 64K D램 가격은 폭락을 거듭해 1985년 중반에 30센트까지 떨어졌다. 제품을 하나 팔 때마다 1달러40센트를 손해 보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당시 인텔은 삼성의 1M D램 개발이 한창이던 1985~1986년 백기를 들고 D램 사업 철수를 선언하기도 했다. 반도체 가격 폭락으로 손실이 이어지는 데다 반도체 사업을 추진해온 이병철 선대 회장이 영면하자 1987년 삼성 중역들은 신임 이건희 회장에게 반도체 사업을 포기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반도체 사업 추진을 강행했다. 결국 이듬해인 1988년 반도체 호황이 찾아왔고 삼성은 그동안 투자했던 재원 이상을 반도체 사업에서 벌어들이게 됐다. 2차 위기는 1990년대 'D램 대전'이었다. 당시 미국 인텔을 포함해 일본 NEC와 도시바, 독일 인피니언 등 기라성 같은 업체가 D램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했다. 1994년 세계 D램 업체 수는 25개였지만 10년 뒤인 2002년에는 12개, 또다시 10년 뒤인 2012년에는 3개로 줄어들었다. 30년에 걸친 D램 대전에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3사만 살아남게 됐다. 업계 관계자는 "치킨게임이 두려워 경쟁을 피하고 투자를 보류했다면 아마 반도체 역사에서 삼성이라는 이름은 사라졌을 것"이라며 "위기 때 오히려 투자를 강화한 경영진의 판단이 주효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