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파란 2017년 봄호…그때의, 그곳의, 그것은 지금 없지만 사라지지않아
계간 파란 2017년 봄호 표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47)의 영화 '인셉션(2010년)'에서 코브(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드림머신을 통해 타인의 꿈으로 들어간다. 그 꿈에 또 다른 꿈을 만들고, 의식에 흐르는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가로채거나 조작한다. 그 세계는 깊은 못이다. 기억의 소재가 불분명해 탄탄한 설계가 필요하다. 운이 좋으면 단번에 만날 수 있겠지만, 컴퓨터 바탕화면에 모든 문서를 펼쳐놓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폴더를 열고 또 다른 폴더 안으로 들어가 눈을 부릅떠야 한다. 이렇게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다보면 코브처럼 자신이 꿈속에 있는지, 현실에 있는지 혼란을 겪을 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뜻밖의 기억에 부딪히거나 긍정과 부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극복할 수 없는 분열을 맛볼 수도 있다. 스스로의 꿈에 들어간다면 그 후유증은 더 클 것이다. 계간파란의 '2017년 봄'의 표지를 보고 드림머신이 떠올랐다. 주제가 '기원'이다. 사물이 처음으로 생김, 또는 그런 근원. 왜 드림머신이 떠올랐을까. 자의로 폴더 여러 개를 열고 확인하다보니 또 다른 의문이 들었다. 왜 인셉션을 감상했으며, 왜 영화를 대학에서 전공까지 했느냐다. 까까머리에 연두색 교복을 입고 뛰놀던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단번에 폴더를 찾았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시계태엽 오렌지(1971년).'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 스틸 컷
알렉스는 비행소년을 넘어선 망종이다. 친구들과 약물에 취해 늙은 노숙자를 폭행하고, 차를 훔쳐 달아난다. 작가 알렉산더를 폭행하고 그의 아내를 강간하는가 하면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살해하기까지 한다. 경찰에 검거된 알렉스는 살인죄로 14년형을 언도받지만, 내무부장관이 주도하는 루도비코 갱생 프로그램에 지원해 2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루도비코 갱생 프로그램은 재소자에게 약물과 충격요법으로 각종 범죄에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교화 실험이다. 커다란 주사로 약물을 투입하고, 강제로 눈을 벌려 폭력과 섹스로 가득한 영상을 보여준다. 알렉스는 극심한 고통과 무기력 증상을 보이다가 건물에서 투신한다. 하지만 목숨을 건지고 병원 치료를 받으면서 교활한 미소를 짓는다. "나는 완전히 치유되었어." 나는 이 영화를 처음 보여준 국사 선생님과 한바탕 갑론을박했다. 알렉스가 결국 야수적 본성을 되찾았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아무리 망종이라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해해선 안 된다는 말을 하기 위해 이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봤다. 그래서 알렉스의 마지막 대사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따른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분의 완강한 자세에 나는 뒷걸음질을 쳤고, 씩씩거리며 돌아온 집에서 영상을 복기했다. 잠을 청하려고 누워도 마지막 대사가 계속 뇌리를 맴돌았다. 결국 다시 선생님을 찾아갔고, 또 한 번 설전을 벌였다. 그때 생각했다. 언젠가는 시계태엽 오렌지와 같은 영화를 만들겠노라고. 곱씹어보니 즐거운 기억이 아니다. 영화 공부를 너무 쉽게 선택했고, 꿈도 이루지 못했다. 재능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노력이 부족했던 걸까. 먼지의 이빨에 갉아 먹힌 폴더를 다시 열고 과거의 나를 다시 돌아본다.
1994년 10월21일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 당시 모습
나희덕 시인은 기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변화의 흐름 위에 하나의 소용돌이처럼 머물면서 고유의 운율에 따라 최초의 사건들을 그 안으로 끌어들인다. (중략) 한편으로는 복원과 복구로 인식되기를,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런 이유에서 아직 종결되지 않은 미완성의 상태로 인식되기를 원한다." 내게는 정확한 정의다. 갑론을박으로부터 20년 가까이 흘렀는데도 선생님의 얼굴을 또렷이 기억한다. 설전한 내용도 구체적으로 생각난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훨씬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당시 기억에 마침표를 찍으면서까지 폴더를 파기하고 싶진 않다. 그 뒤로 노력해 쌓은 성들이 한 줌의 모래로 흩날릴 것 같은 두려움이 든다. 이 책의 편집 주간인 장석원 시인은 소개하는 글인 '불멸하는 전집'에 이렇게 적었다. "그때의, 그곳의, 그것은 지금 여기에 없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기원은 죽지 않지만, 또한 부활할 수 없다. 기원은 여전히 우리 영육의 한 부분으로 오늘의 삶을 구성하고 있다."
김광석
이 책에서 기원의 대상은 1980~90년대이다. 30대 이상이라면 누구나 직간접적으로 겪었을 소재 예순일곱 가지를 필자 마흔네 명의 글로 전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서태지와 아이들, 김광석, 대학가 서점, 집회, 전교조, 프로야구, 1988년 서울올림픽, 애마부인, 터미네이터, 장만옥, 동사서독, 왕가위, 비트, 재패니메이션, 롯데월드, X세대,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김현식, 가요 톱 텐, 전자오락실, 성문종합영어, 수학의 정석, 우리들의 천국, 모래시계, 마돈나, 롤러장. 모두 '수', '금', '지', '화', '목', '토', '천', '해'에 자연스럽게 '명'을 연상하듯 추억의 폴더를 자동으로 열어준다. 그렇게 만나는 기억은 또 다른 기억을 소환하고, 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어느덧 기원과 마주하게 된다. 그 실체가 보잘 것 없고 형편없더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지러운 정국과 팍팍한 살림살이로 분별과 분리가 중요해진 시대다. 우리의 역사가 어떻게 형성됐고, 현재를 거쳐 미래의 어느 지점을 향하는지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모든 기억이 따뜻하게 반겨줄 리는 없다. 나처럼 한동안 잊은 아픔이 툭 튀어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어디 후유증이 알렉스만 하겠는가. 담배라도 한 대 태우고 나면 금세 잊힌다. 검지손톱으로 두어 번 불씨를 튕기면 연기처럼 꺼지는 것 또한 기억이므로. <채상우·장석원 등 44명 지음/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1만5000원>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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