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열기자
사이먼 크리츨리 지음<br /> 문순표 옮김<br /> 이후<br /> 2만원
책의 주된 흐름은 20세기 전체주의 움직임을 연구했던 이탈리아의 파시즘 연구자 에밀리오 젠틸레의 '정치의 신성화'라는 키워드와도 맞닿아 있다. 이 책을 옮긴 문순표씨에 따르면, 정치의 신성화를 주장한 젠틸레는 신정분리가 이루어져 사적인 영역으로 물러났던 종교 혹은 종교적인 관습이 다시 정치체제라는 공적인 영역으로 돌아오는 순간에 주목했다.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06년 워싱턴에서 열린 한 연설에서 "오늘의 다원적 민주주의 상황 속에서 정치와 신앙을 어떻게 융화시킬 것인지 진지하게 논의할 때가 왔다"고 말한 적도 있다. 믿음 혹은 신앙이 현실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을 따져본다는 측면에서 보면 같은 고민의 연장선에 있다.역사 교과서를 어떤 방식으로 만들 것인지를 두고 정치권을 중심으로 양분된 한국 사회에서도 저자의 이러한 분석틀은 큰 오차 없이 들어맞는다. 역사책을 쓰는 건 국가여야 한다는 특정 정치집단의 판단은 그 자체로 믿음 혹은 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는 모양새로 읽힌다. 이런 판단과정에서는 합리적인 이성이 발붙일 틈이 없다. 자칫 밉보이면 목이 날아갈 수도 있다는 처연하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을 제외한다면 말이다.책의 대부분이 현상을 분석하는 데 주력했다면 '결론'이라고 한 마지막 장의 제목도 눈길을 끈다. "네가 믿는 대로 될지어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 글귀는 우리가 어떠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이러한 고민이 왜 중요한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결어다. 초월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실체에 기대지 않는 '믿음 없는 믿음'이 정치가 올바르게 작동하기 위한 조건이라는 얘기다.이 책을 쓴 사이먼 크리츨리의 이력은 평범치 않다. 성인으로 접어들 무렵 철학공부를 시작해 영미권 분석철학은 물론 윤리학이나 대륙철학에 관한 연구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이전까지 국내에 유일하게 번역된 '죽은 철학자들의 서'를 비롯해 그간 펴낸 책들의 면면을 보면 대중을 위한 입문서 성격의 책이 대부분이다.책의 원제에도 들어 있는 '믿음'이라는 말은 faith의 번역이다. 문맥에 따라 '신앙'이라는 단어가 더 그럴듯한 의미를 전달할 때도 있다. 이번 한글판에서는 맥락에 따라 각기 원어를 표기하면서도 읽기 자연스럽게 구분하는 등 독자를 배려한 흔적이 눈에 띈다.통상 책을 읽을 때 뒤쪽에 따라붙는 해제를 중히 여기지 않는 편에 속한다. 저자 혹은 역자가 가리키는 곳보다는 독자 나름의 직관이나 식견에 따라 풀어내는 게 맞는다고 본다. 그런데 이 책은 좀 다르다. 다양한 철학자의 사유를 성큼성큼 건너 뛰어가며 소개하는 탓에 저자가 의도한 생각의 흐름을 좇기 쉽지 않는 부분도 꽤 된다. 이를 막기 위해 해제를 간단히 훑고 책을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지은이가 쓴 서문을 미리 꼼꼼히 챙겨야하는 건 이 책도 마찬가지다.최대열 기자 dychoi@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