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여담]터부

전필수 증권부장

주말 저녁 지방의 어느 상갓집. 조문을 하고 언제나처럼 혹시 익숙한 얼굴이 있나 상가를 주욱 둘러본다. 다음 달 결혼을 앞둔 후배의 얼굴이 보인다. 친한 친구의 상이니 오는 게 당연한데 '조금 있으면 결혼인데 용케 왔구나'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십수년 전 결혼 날짜를 받던 때가 생각났다. 어머니는 결혼 날짜를 잡았으니 다른 사람 결혼식도 가지 말고 상가도 가면 안 된다고 단단히 주의를 주셨다. "아니 사회생활을 하지 말란 것도 아니고, 어떻게 몇 달간 경조사를 안 챙겨요?"즉각적인 반발에 어머니는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를 달래듯 "그런 건 다른 사람들도 다 이해를 한다"며 절대 가면 안 된다고 다짐까지 받으려 하셨다. 답답한 마음에 아버지 쪽을 봤더니 아버지 역시 어머니의 '터부(금기)'를 인정하는 모습이셨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미신을 믿느냐"는 반박에 아버지는 "안 좋다는데 굳이 해서 좋을 건 뭐가 있냐"고 어머니 쪽 손을 드셨다. 결국 그 자리에선 "알았다"고 했지만 마음 속으론 여전히 수긍할 수 없었다. 다행히(?) 부모님과 떨어져 살고 있던 터라 경조사를 챙기더라도 부모님이 알 방도도 없었다. 결혼 후 첫째가 태어나니 다시 어머니의 '터부' 항목은 추가됐다. 한번 부딪힌 경험 덕인지 더 이상의 논쟁은 없었다. 나이가 좀 더 든 탓인지, 아이가 연관돼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정말 조심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조금 들었다. '금기'를 이유로 경조사에 빠지는 이들이 주위에서 보이자 '굳이 좋을 게 없다는데…'라는 아버지의 예전 말씀에 공감이 일부 되기도 했다. 그렇게 옛 사람들의 생각을 닮아가던 차에 결혼을 앞두고 조문을 온 후배를 보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냉정하게 보면 '금기'의 밑바닥엔 이기심이 똬리를 틀고 있다. 결혼을 앞두고 상가를 가지 않는 것은 나의 좋은 일에 죽은 이의 기운이 영향을 미치지 말라는 뜻에서다. 상을 당한 지인의 슬픔을 나누는 것보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내 행복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는 게 더 중요한 셈이다. 지인의 경조사를 챙기는 것은 사람의 도리다. 그에 대한 '금기'는 어찌보면 귀신의 영역이다. 귀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설령 있다손 치더라도 사람의 도리가 먼저 아닐까.전필수 증권부장 philsu@<ⓒ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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