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철상 신협중앙회장
얼마 전 부산의 한 여성 약사가 절망의 끝에서 힘겹게 살던 60대 남성에게 현금 100만원을 조건 없이 베풀어 희망을 준 사연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보청기 하나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한 남성의 어려움을 듣고 선뜻 100만원을 내줬고, 실제 그 남성은 보청기를 구입했으며, 보청기 덕분에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아홉 달 만에 100만원을 모두 갚았으며 지금은 서로 안부를 나눌 정도로 정다운 이웃이 되었다는 참으로 동화같은 이야기였다. 정말 단돈 100만원이 아름다운 기적을 만든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약사는 바로 부산시 약사신협의 조합원이어서 더욱 반갑고 놀라웠다. 한편으로 서민을 위한 금융기관인 신협에 33년간 몸담아 온 사람으로서 그저 훈훈함만을 느끼기에는, 우리 사회 어두운 곳에서 금융소외계층이 겪는 각박한 현실이 떠올라 가슴 한편이 아프고 일견 부끄럽기도 했다. 그에게 생명줄과도 같았던 보청기 살 돈 100만원. 그런데 왜 그에게 손 내미는 금융회사가 대한민국에서는 한 군데도 없었을까. 최근 고금리 대부업과 사채의 폐해가 드러날 때마다 신협의 존재가 상대적으로 강조되곤 한다. 1960년대 초 민간 주도로 설립된 신협이 약탈적 고금리로 고통받던 서민들의 사회경제적 자립과 지위향상을 도모했던 기존의 정체성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이것은 옳은 지적이다. 신협은 설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정체성에 대해 늘 고민해온 조직이다. 한 조직이 정체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성찰해왔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왜냐하면 정체성은 올바르고 바람직한 조직의 모습,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조직 구성원들의 의지를 담아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협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중에서도 서민금융의 관점에서 신협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서민금융을 표방하는 신협에서도 다 포용하지 못하고 있는 '보청기 살 돈만 있어도 일어설 수 있는', 자활의지는 높지만 저신용이나 상환능력이 문제가 되어 제도권 금융의 수혜를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신협에서 이들을 다 포용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런데 신협뿐만 아니라 다른 상호금융권에서 예전처럼 이런 신용대출을 늘리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따로 있다. 바로 2000년대 초에 도입된 현재의 감독정책이다. 이 정책은 대출건전성 분류기준 및 대손충당금 설정비율 강화, 개인신용평점제도(CSS)의 적용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 제도가 온존하는 한 제도권금융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이 신협을 비롯한 상호금융권에서 신용대출을 받기란 결코 녹록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감독정책을 과거의 상황으로 회귀해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신협은 600만명의 조합원들이 이용하고 있는 금융협동조합으로서 건전성 관리를 중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협은 현재의 제도권 내에서 서민금융에 충실하는 것뿐만 아니라 제도권 밖에서 금융소외계층을 아우를 수 있는 방안을 끊임없이 모색해왔다. 지난 10월 국내 최초의 기부협동조합인 '신협사회공헌법인' 창립이 첫 번째 결실이다. 일반 기부단체와 달리 신협 임직원들이 주축이 된 사회적 협동조합 형태로 발족했다. 이러한 조직형태가 현재 신협이 제도적 제약을 넘어서 소외된 서민금융을 포용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전국적으로 저소득계층, 자활의지가 있는 저신용 계층 등을 지원하게 되며, 단순한 대출뿐만이 아니라 자활을 지원하는 일까지 아우를 계획이다. 결국 제도권 안에서는 신협이, 제도권 밖에서는 신협사회공헌법인이 서민금융, 서민지원을 위해 쌍두마차처럼 움직일 것이다. 이것이 신협의 정체성에 걸맞은 모습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문철상 신협중앙회장<ⓒ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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