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앤비전]효율적인 시스템 운용, 인재관리에 달렸다

국가와 사회의 발전 정도를 측정하는 데는 다양한 기준이 있다. 그중 가장 유용한 판단기준 중 하나는 그 운영 시스템이 얼마나 유기적이고 효율적인지를 보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산업혁명의 물결에 뒤늦게 합류한 국가들은 선진국의 앞선 시스템을 도입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나름의 역사적 배경이나 사회환경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마냥 따라하다가 큰 낭패를 보기도 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시스템의 효율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그 답은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인류문명의 역사는 시스템의 정교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토를 확장하고 인구가 늘수록 관리범위는 넓어지고 시스템은 복잡해진다. 사회의 욕구가 다양해지는 반면 자원은 제한적이다. 시스템의 효율성이라는 가치는 더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가경영 시스템도 인류의 지혜가 쌓일수록 보통은 더욱 정교해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스템의 문제를 보완하는 여러 장치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우리가 잘 아는 고대문명 중에는 현재의 기준으로 보아도 손색없는 시스템을 갖춘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4600여년 전에 건설된 모헨조다로의 상하수도 시설, 2500여년 전의 페르시아 도로시설, 1000여년 전의 은행제도 등이 그 사례이다.  이처럼 역사를 돌아볼 때 어떤 사회의 시스템은 그 사회가 전성기일 때나 쇠퇴기일 때에도 시스템 자체는 유사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왜 이러한 유사한 시스템을 갖추고도 전성기와 쇠퇴기라는 결정적인 차이가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 소설이나 드라마를 보면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왕조는 아무런 준비 없이 허망하게 기습을 당한 것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과 당시 선비들이 남긴 역사의 기록을 보면 사실과는 다른 것 같다.  조선은 선조 23년(1590년) 왜의 정세를 살피고자 통신사를 보냈다. 그런데 통신사의 결과보고는 상반된 의견으로 나뉘었다. 침략은 없다는 것과 전쟁이 있을 것이라는 보고였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선조는 이러한 상반된 보고를 모두 신뢰했다. 삼포에 거주하는 왜인들이 크고 작은 소요를 일으킨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속조치로 국방 시스템과 인력 개편을 단행한다. 4군 6진 개척 이래 국방의 기본개념은 진관체제(鎭管體制)였다. 야인들이 침략할 움직임을 보이면 선제공격을 하고, 전시에는 각 진을 방어하면서 중앙정부에서 진압군을 편성해 투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스템은 선조 16년(1583년)에 일어난 이탕개(尼蕩介)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중앙군이 내려오기 전에 각 진들이 격파당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는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주요 거점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의 군사를 집결시키고, 중앙정부에서는 유능한 장수를 파견해 군대를 지휘토록 하는 방식이다. 기존의 진관체제보다 대응속도가 빠르고 경비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또한 우수한 장수들을 발굴하기 위해 대대적인 인사개편을 단행했다. 이때 우리가 잘 아는 이순신을 비롯한 인재 28명이 요소요소에 배치됐다. 그러나 조선은 왜군의 침략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적군은 조선의 국방 시스템이 예상한 반응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침략해왔다. 게다가 시스템을 운용하는 장수와 병사는 실전경험이 부족했다.  우리는 문제가 발생하면 시스템을 점검한다. 그런데 상당수는 시스템보다는 예측하지 못한 외부변수와 운용하는 사람이 문제였던 경우가 많다. 사회가 고도화 될수록 변수는 더 많아지고 더 빠른 대응을 필요로 한다. 시스템은 알려진 변수에는 대응하는 최선책이지만, 예측하지 못하는 변수는 얼마나 신속 정확하게 대응하느냐 하는 데에서 성패가 결정되고 이는 결국 시스템을 운용하는 사람의 역량에 기댈 수밖에 없다. 인재 관리야말로 효율적인 시스템 운용의 핵심요소이다.<ⓒ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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