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게 내리는 눈을 맞으며 목욕탕에 들어선 건 아침 9시쯤. 토요일인 데도 손님이 그리 많지 않다. 최근 리뉴얼 공사를 했다는데 예산이 빠듯했던지 손길이 못 미친 데가 구석구석 눈에 띈다. 손님의 주요 동선인 옷장과 샤워 부스, 온탕은 새로 단장해 비교적 말끔했지만, 증기탕과 화장실은 오랜 세월의 맨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간단하게 아침 먹고 동네 목욕탕에서 만나자"던 동생이 전화 말미에 불쑥 덧붙인 말이 생각났다. "형, 아주 오래된 목욕탕이지만 최근 손을 좀 봐서 그럭저럭 괜찮아." 동생이 아니라 친구 ㅂ이었으면 "눈 화장은 꼼꼼히 해서 잔주름을 감췄지만 립스틱은 반쯤 바르다 만 목욕탕"이라고 빈정댔을 것이다. 계산대에서 일회용 칫솔과 면도기, 샴푸 한 봉지를 사들고 들어가 이곳저곳 둘러봤지만 동생은 아직 오지 않았는지 보이지 않는다. 늘 하던 대로 옷을 벗고, 샤워기 앞에 섰다. 양치하고, 면도하고, 샴푸 봉지를 뜯어 머리를 감았다. 쓰고 난 일회용 칫솔과 면도기는 쓰레기통에 획 던졌는데 샴푸는 선뜻 버릴 수 없다. 아직도 봉지에 반 이상 남아있는 것이다. 버릴까 말까 잠깐 고민하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동생이 올 테니 남겨 뒀다가 주기로 한 것이다. 늘 느끼는 거지만 일회용 샴푸는 왜 이리 많이 담겨져 나오는 걸까? 머리를 두세 번 감아도 3분 1은 거뜬히 남는 분량, 이거 샴푸회사의 고약한 상술 아닐까? 분량을 반으로 줄이고 가격도 낮추면 좋으련만…. 일회용 샴푸가 봉지에 남았다고 집에 가져가서 쓰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고, 버릴 게 뻔한데…. 그렇게 버려진 샴푸는 하수도를 통해 한강으로 흘러들 것이고…. 서울에 목욕탕이 몇 개고 하루에 이렇게 무의미하게 버려지는 샴푸가 대체 얼마란 말인가. 샴푸회사의 얄팍한 상술로 한강 오염이 더 심해지는 거 아닌가. 뜨거운 물에 온몸을 푹 담근 채 모처럼 좋은 일을 한 것 같아 뿌듯했다. 비록 샴푸 반 봉지지만 그냥 버리지 않은 게 못내 대견한 것이다. 이윽고 동생의 하얀 알몸이 뿌연 증기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으로 샴푸봉지가 놓인 곳을 가리켰지만…. 동생의 머리를 본 순간 '남은 샴푸 갖다 쓰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말았다. 심각하게 빠지는 머리카락으로 고민하던 그가 이미 몇 년 전부터 머리를 다 밀고 다니는 걸 깜박했던 것이다(다음 날 '샴푸사건'의 전말을 전해들은 동생은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형, 그거 그냥 주지 그랬어. 때에 따라 비누도 쓰고 샴푸도 쓰는데…." 어떤 때 비누 쓰고 어떤 때 샴푸 쓰는지가 엄청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치우(恥愚)><ⓒ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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