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스토리] '恨' 형장 미루나무엔 의병장 원혼이, 한평 독방엔 만해의 통곡 들린다

스토리텔링 서울 64. 서대문형무소

일제시대 독립운동가 2만명 수감해방 후엔 반독재, 민주화운동가 가둬우리민족 어두운 역사의 상징역사관 개관 3년, 年 50만명 찾아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전경.

[아시아경제 김지은 기자]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에 위치한 서대문 독립공원. 지난 27일 오후 눈이 내리는 흐린 날씨에 독립공원의 입구에 들어섰을 때, 한적함과 조용함을 넘어 을씨년스러움까지 느껴졌다. 차들이 바삐 오가는 서울의 도심과는 전혀 다른 공간에 온 기분이 들었다.  민족의 수난과 오욕, 애통한 선열들의 원혼, 그리고 자유와 평화를 위한 염원이 또한 서려 있는 곳. 이곳이 우리 근현대사의 비극과 재난을 상징하게 된 것은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한 뒤 감옥을 세우면서부터였다.  "대개 감옥은 혐오시설이라 도시 외곽에 짓잖아요? 그런데 이곳은 당시에 사대문 안과 밖을 동서남북으로 잇는 주요 교통로가 있는 곳이었어요. 왜 사람들이 많이 다닌 곳에 감옥을 지었을까요? "  독립공원 내에 있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김태동 차장은 "그게 다 일제가 우리 민족을 탄압하고 억누르겠다는 속셈이 아니었겠어요?"라고 반문하듯 말했다. 원래 경성감옥이었던 서대문형무소는 1912년 마포 공덕동에 대규모 감옥이 신축되면서 그 이름을 공덕동 감옥에게 내주고 '서대문 감옥'으로, 1923년에는 다시 '서대문 형무소'로 바뀌었다. 

제12옥사의 복도. 복도 양옆에는 감방이 늘어서있다.

개소 초기의 수감인원은 500여명이었지만 일제의 침략에 무력으로 맞섰던 의병들이 갇히고 3ㆍ1독립만세운동으로 수감자 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이후 광복 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내외 비밀결사, 각종 의열투쟁과 해외 무장투쟁, 사회ㆍ문화ㆍ농민ㆍ학생 운동 등을 펼치다가 수감된 독립운동가 수는 2만명을 넘어섰다. 수감자 수가 늘어난 것은 그만큼 일제의 압제가 가혹해졌다는 것을, 그럼에도 민족의 독립 투혼은 꺾이지 않고 더욱 불타올랐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곳에 수감됐던 독립운동가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또 어떻게 수감의 고통을 견뎌냈을까. 서대문형무소 관람의 첫 번째 공간인 '전시관'에 들어서자 독립운동가들의 얼굴과 표정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항일 의병 투쟁을 하다 수감된 이강년 의병장이 1908년에 쓴 옥중서한은 사형을 앞두고 아들에게 전하는 글이다.  '승아에게 유언하여 보냄- 네 아비의 평생에 품은 단충은/ 왕가의 일에 죽고자 한 것인데,/ 이제 뜻을 이루니 또 무었을 한탄하랴./ 놀라고 두려워하기에 이르지 말고/ 정신을 수습하여 네 아우를 데리고/ 그 날 옥문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라' 놀랍게도 죽음을 앞둔 그의 서한에는 억울함이나 두려움보다는 담담함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묻어났다. 비애와 나라를 위해 죽고자 하는 결연한 마음이 절절하다. 

고문을 받은 뒤 구금된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본뜬 모형.

애통하고 비감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감옥 둘레 사방으로 산뿐인데 해일처럼 눈은 오고, 철창은 도대체 풀릴 기미가 없는데, 무쇠처럼 찬 이불 속에서 재가 되는 꿈을 꾸었다.(만해 한용운). 옥사 바깥에는 나라의 자주와 독립을 염원해 1898년에 세운 독립문이 서 있었다. 창문 밖으로 그 독립문을 올려다보는 이들의 심정은 또 얼마나 절통했을까. 전시관에는 독립운동가의 기록 중 현재 남아 있는 5000여장의 수형기록표도 전시되어 있다. 기록표에 붙어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사진, 거기에는 비장함, 피곤함, 슬픔, 담담함, 냉소, 진지함이 있었다. 각각의 얼굴들마다 서로 다른 감정이 깃들여 있는 듯했다. 그러나 한 가지 일치하는 것이 있다면 '독립에 대한 열망'이었다. 그랬기에 모진 고문과 노역, 배고픔과 추위, 외로움과 공포 등을 이겨냈을 것이다.

일제시대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된 후 순국한 독립운동가들의 모습.

사형장 앞에는 미루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1923년에 심어진 나무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애국지사들은 생의 마지막 순간 이 나무를 붙잡고는 독립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 하는 원통함을 눈물로 토해냈다고 한다. 눈과 비를 맞아 축 늘어진 이 나무는 그래서인지 온몸으로 순국선열들의 슬픔을 표현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서대문형무소의 '비극'은 어쩌면 해방 이후에 찾아왔는지 모른다. 1945년 광복 이후 서대문형무소에는 좌우익의 대결 속에 희생된 이들, 그리고 반독재 민주화운동가들로 만원이었다. 독재정권에 의해 조작된 진보당 사건, 민족일보 사건, 동베를린간첩단 사건,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피해자들, 그리고 70, 80년대의 수많은 지식인들과 청년학생, 노동자들이 민주와 자유를 외쳤다는 이유로 이곳에 갇혔다. 그것은 이민족의 침략자에게 당한 수난 이상의 참혹한 고통이었다.  형무소를 둘러보던 조용국(62)씨는 "독립운동가들이 희생됐던 이곳이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해방 이후 같은 국민을 탄압하는 장소로 쓰였다는 것을 알았다면 얼마나 애통해할까요"라고 씁쓸해했다. 친구들과 함께 이 곳을 찾은 김민석(15)군은 "서대문형무소가 독립운동가들만 수감된 곳인 줄 알았는데 민주운동가들마저도 이 곳에서 사형당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고 말했다.  수난과 오욕의 역사를 뒤로하고 서대문형무소는 이제 도심 속의 역사관이 돼 있다. 이번 달로 개관한 지 3년. 매년 50여만명이 이곳을 찾아 역사의 교훈을 배워가고 있다.  서대문형무소는 어두운 옛 역사를 증언하며 서 있다. 적색 벽돌의 옛 옥사들은 이곳에 갇혔던 이들이 그토록 원했던 진정한 독립과 민주주의가 과연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물음을 함께 던지고 있는 듯하다. 김지은 기자 muse86i@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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