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과 어느 가수의 인생(1)
1978년 여름 MBC 대학가요제가 전국에 방영되던 저녁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하얀 그랜드 피아노 앞에 하얀 드레스를 입고 살포시 내려앉아 부러질 것같이 앙증맞은 손을 건반 위에서 빠르게 움직이며 노래를 부르던 여자. 명지대학생 심수봉은 12인치 금성 흑백 텔레비전 상자 안에서 태어난 요정이었다. 대학가요제는 그 전해부터 시작한, 왠지 수상한 음악제였다. 2차 오일쇼크, 대통령 긴급조치로 거리는 잔뜩 움츠려 있고 행동이나 복장이 조금이라도 튀면 잡아가는 판에, 젊음을 구가하는 가요제라니…. 가요가 그렇게 빈사상태에 접어든 것은 독재로 접어드는 정권이 사람들을 겁주는 데 이용해 먹었던, 금지곡 지정과 대마초 가수 파문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마치 젊음의 피가 부족해서 그런 것인 양, 빈혈의 가요계에 긴급 수혈을 하겠다고 방송과 그 뒤의 권력이 팔을 걷고 나선 것이었다. 대학과 가요는 당시로 봐도 아주 잘 어울리는 개념 '조합'이 아니었다. 텔레비전은 왜 이런 가요제를 기획했을까? 당시 정권은 대학의 '품격'을 가요계에 이식시켜 가요를 정화하고 업그레이드하려는 야심을 지녔던 듯하다. 관제가요제의 냄새가 잔뜩 풍기는 이 잔치는 그러나 방송의 힘을 업고 당시 놀 거리도 볼거리도 부족하던 사회를 쉽게 파고들었다.돌이켜보면 그 노래들은 젊음의 자유나 방일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건전가요라는 이름에 가까운 얌전한 것들뿐이었다. 사랑이란 말도 퇴폐적이고 불온한 것으로 여겨지던 때였던가? 77년 첫 대학가요제의 그랑프리 곡은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였다. 김창완이 지은 이 노래마저 젊은 세대의 무책임을 조장한다는 눈총을 받았던 것이 기억난다. 심수봉이 데뷔하던 해의 대상은 '밀려오는 파도 소리에'라는 노래였다. 최헌의 '오동잎'같이 단조롭고 허전한 노래들에 익숙해있던 사람들에게 이런 분위기의 다소 지적이고 복잡한 리듬이 얽힌 노래는 신선한 즐거움을 던졌음이 분명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은 대학생이 부른 절절한 트로트곡으로 대중의 감성을 쥐고 흔들었다. 전통적인 트로트문법이 충실히 반영된 이 곡에는 남녀노소의 입속에 착착 달라붙는 끈끈이주걱 같은 게 있었다. 게다가 이 부서질 듯 가녀린 여자, 심수봉의 버들가지 휘청이는 애절한 청승이 가세하여 이 노래를 폭발하게 하였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사랑의 괴로움을 몰래 감추고/떠난 사람 못 잊어서 울던 그 사람.' 그 시절 대중가요는 거의 모든 세대가 애창하던 넘버18번이었지만 70년대 중반부터 위력을 얻기 시작한 통기타 붐과 포크송 바람이 세대를 두 개로 크게 쌍알지게 하고 있었다. 이른바 젊은 세대는 이미자ㆍ패티김의 반짝이드레스와 습한 밤무대 분위기를 진부하게 여기고 있었고,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은 느리고 끈적끈적한 음감이 사라지고 바이브레이션도 충실하지 않은 이상한 노래들과 구질구질해 보이는 장발머리와 청바지 차림의 가수들을 싫어했다. '그때 그 사람'은, 대중문화 평론가 강헌의 말을 빌리면, 이 두 세대의 반목을 일거에 화해시킨 절묘한 접점이었다. 어느 세대도 싫어하려야 싫어할 수 없는 마력이 숨어있었다. 얼어붙은 시절의 끔찍한 정적에 한 가닥 한숨처럼 불어온 낭만주의의 온기, 왠지 비극적인 냄새를 가득 담은 그 노래는, 심수봉이 꼭 1년 뒤 만났던 운명의 파티를 예고하는 서주(序奏)가 되었던 것을 우린 모두 인상 깊게 기억한다.(이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포함한 삶의 속내를, 심수봉은 1994년 12월 '사랑밖엔 난 몰라'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냈다.)심수봉의 집은 이층집인데 층마다 피아노가 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이런 얘기가 내겐 그녀를 처음 본 날의 하얀 나비 같은 이미지를 더욱 보강해준다. 이미 아내와 어머니가 된 한 여자, 심수봉은 그 피아노 앞에서 어떻게 늙어가고 있을까? 데뷔 이후 심수봉이 노래하던 모습은 정적이다 못해 식물적이었다. 한자리에 붙박여 조심조심 불러나가는 그녀의 가창 태도는 심수봉의 노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정교하게 암시하기도 한다. 그녀는 천생 여자다. 여자라도 한참 옛날 여자다. 어쩌면 그때 그 대학생의 뉘앙스로는 잘 어울리지 않을 듯한, 천연덕스럽고 요염한 기운, 혹은 요부(妖婦)의 '끼'를 풍겼다. 순수라는 이름의 뻣뻣한 분위기 안에서 순치된 젊음의 폭발력이 덜 연소된 내연기관처럼 피비빅거리던 그 대학가요제에서, 심수봉은 아주 노숙해 보였고 도발적인 색정을 목소리에 깔고 소년과 중년의 심금을 동시에 울렸다. 어쩌면 그 가요제는 트로트에 대한 경멸에서 시작된 잔치였는지도 모르지만 '그때 그 사람'은 이후 가장 대학가요제적인 노래로 기억되었고 트로트는 이 눈부신, 지적(知的) 일신(一新)으로 한때 새롭게 경배되는 장르가 되었다.
그녀는, 잡아보면 저 여리고 작은 몸집 속 어디서 저렇게 우렁차고 절절한 소리가 나왔을까 싶은, 여치를 닮았다. 풀 속 어딘가에 꼼짝 않고 숨어서 노래 부르는 그 벌레처럼, 그녀도 무대매너라 불릴 만한 움직임이 전혀 없다. 그저 가슴속 울림통만 천 길 바람을 담은 항아리처럼 진동시키면서 무장무장 곰삭고 피리혀처럼 굽이굽이 피눈물을 돌아나온 목청을 돋운다. 1985년 전두환씨의 "저 노래 뭐 저래?…치워"라는 한마디에 졸지에 금지곡이 되어버린 '무궁화'를 제외하고는 심수봉의 모든 노래는 사랑노래이다. '아이가 자라서 조국을 물어오거든…무궁화를 보여주렴'이란 가사를 품고 있는 노래 '무궁화'는 박정희를 연상케 하는 것 때문에 권력자의 불쾌감을 샀다. '하늘에 산화한 저 넋이여'라니. 권력자의 입장에선 대중가요 따위의 주제넘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이 노래로 출연정지까지 당했다. 어쨌든 심수봉은 이 특별한 노래 외엔 일편단심으로 사랑이야기를 노래했고 노래마다 아프고 괴롭고 막막하고 밉고 그리운 생각들이 한 뭉치씩 엉켜 들어있다.이제 쿡쿡 쑤시도록 아픈 심수봉을 이야기해야 한다. 운명의 그해, 1979년에 그녀는 스물 다섯 살이었다. 대학가요제에 등장한 뒤 1년 뒤다. 요즘으로 치면 국정원인 중앙정보부의 의전과장인 박선호는 대통령이 그녀의 노래를 아주 좋아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경호실 경호처장인 정인형으로부터 청와대에서 있을 만찬에 심부름할 두 여자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박선호는 금방 심수봉을 생각해냈고, 전날 만나본 뒤 괜찮다 싶었던 여대생이자 영화배우 지망생이었던 신○○을 다시 생각해냈다.(신○○은 심수봉보다 한두 살 위였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 후 도미하여 LA에서 살았다.) 그래서 박은 두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때가 1979년 10월26일 오후 네 시가 막 지났을 때쯤이었다. 박선호는 이날 오후 5시20분에 플라자호텔 커피숍에서 신○○을, 또 5시30분에는 뉴내자호텔 커피숍에서 심수봉을 만나기로 약속했다.(심수봉의 원래 이름은 심민경이다. 데뷔하면서 이름을 바꿨다.) 그녀는 그날 TBC에서 쇼쇼쇼 녹화를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정보부 박선호의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취소했다. 박선호는 기타를 가지고 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날 박선호의 연락을 받으면서 심수봉은 며칠 전 꿨던 꿈을 기억해낸다. "갑자기 육영수 여사가 꿈에 보이는 거예요. 내 손을 잡더니, 뭔가를 주면서 꼭 박 대통령에게 전해달라고 하는 거예요." 심수봉은 십여 년 뒤 회고록을 내고서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 육 여사가 전해달라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당신, 오늘 내게 올지 모르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런 일이 눈앞에 있으니, 방탄조끼라도 속에 차고 가라는 것이었을까. 알 수 없다. 이제 두 사람이 만났을 것이니, 그날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있을지도 모른다. 죽음의 자리에서 보면 삶은 이렇듯 무상하고 부질없다.심수봉은 이 만남이 '구겨진 인생'의 서막인 줄은 결코 몰랐으리라. 막 주가가 올라가고 있던 시절이라 대통령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이 스스로 대견하고 즐거웠으리라. 그날 이전에도 심수봉은 몇 번 비슷한 콜을 받고 대통령을 만났다. 대학생으로서 대통령의 술자리에 참석한다는 사실이 꺼림칙했을 수도 있겠으나 권력자의 콜을 거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누가 거절할 수 있겠는가?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낮 헬기를 타고 아산만 방조제를 순시했다. 오랜만에 가을들녘을 돌아보고 온 길이라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때는 부마항쟁 사건이 터진 지 열흘쯤 되는 때였고, 또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의원에서 제명된 이후 최악의 정국이 계속되고 있는 때라서 대통령의 심기가 아주 불편해져 있었다. 그래서 머리도 식힐 겸, 서해안 순시 일정을 잡았던 것이다. 그리고 모처럼의 즐거움을 좀 이어보자는 취지에서 대통령은 이날 저녁의 만찬을 생각했으리라. 궁정동 안가의 그날 술자리는 왠지 어색하고 딱딱했다. 술상 위에는 여러 가지 나물이 안주로 올라와 있고 시바스리갈 몇 병이 놓여 있었다. 마침 텔레비전에서 김영삼씨가 외국 인사를 만나는 장면이 나왔는데 박 대통령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고 한다. 누군가가 분위기를 좀 풀어보라고 하면서 심수봉에게 노래를 시켰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기타를 식탁 위로 올리고는 '그때 그 사람'을 부르기 시작했다.(당시 그녀의 얼굴이 못생겨 병풍 뒤에 숨어서 노래를 불렀다는 소문도 돌았는데 이는 말도 안 되는 낭설이다.) 좌중에 술잔이 돌았다. 그 뒤에도 두어 곡을 더 부른 뒤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이 답가를 불렀다. 그 다음엔 차지철의 지명으로 신○○이 노래를 불렀는데 그녀는 얼굴은 아주 예뻤지만 약간 음치였던 모양이다. 신○○은 청와대에 들어오기 전 차지철과 면접을 할 때 술과 노래를 전혀 못한다고 호소를 했다고 한다. 차지철은 그녀에게 술은 옆에 있는 큰 접시에 슬쩍슬쩍 비우면 되고 노래는 편하게 하라고 말했다. 신○○이 부른 노래는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였다. 심수봉은 기타로 반주를 넣었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이까지 부르다 노래가 멎었다. 음과 박자가 기타에 잘 맞지 않았다. 노래가 잠깐 끊긴 사이에 심수봉은 반주를 맞추기 위해 기타를 튕겨보고 있었다. 그때 박 대통령이 말했다. "이 노래는 나도 아는 노래 같은데…우리 아이들이 가끔씩 부르거든." 신○○이 다시 부르기 시작했을 때 대통령도 나지막이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차지철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각하도 그 노래 아십니까?" <10월29일자 26면에 계속>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 isomis@<ⓒ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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