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철의 말이 아니라도 하림이 어릴 때 다니던 예배당 벽엔 피를 흘리며 힘없이 십자가 못 박혀 있던 예수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처음엔 무서웠지만 자꾸 보니 이상하게 호기심이 생겼다. 그리고 가난한 차림새의 사람들에 둘러싸여 말씀을 하고 있는 넝마 차림의 예수 그림도 있었다. 이제 그런 언덕 위 예배당이 사라진지도 오래였다. 그런 예배당 대신 교회가 들어섰고, 교회엔 더 이상 그런 험악한 모습의 예수 그림은 걸어두지 않았다. 그리고 하림은 더 이상 교회에 가지 않았다. 그래서 남경희가 “혹시 종교를 가지고 있어요?” 하고 물었을 때, 자신없이 “아뇨.” 하고 대답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밤이 깊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처음엔 그저 하림에게 아침에 도와줬던 감사의 표시를 하자고 포도주 한 병을 끼고 찾아온 그녀였을 것이다. 하지만 하다보니 그게 아니었다. 말이 말의 꼬리를 물고 나와 그녀의 아버지가 삼십년 전 베트남에서 겪은 이야기와 교회에 불을 지른 이야기, 그리고 도망치듯 이곳으로 내려와 기도원을 지으려 하는 이야기까지 줄줄이 다 나와 버렸던 것이다. 하림으로선 뜻밖의 정보를 알게 된 셈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림은 끝내 전날 밤, 자신이 본 것에 대해선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총소리가 났고, 자기가 황급히 달려 나가보니 어둠 속에서 어떤 사내가 죽은 개를 끌고 갔고, 끌고 간 개를 그녀의 담장 울타리 근처에 던져두고 가더란 걸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생각하면 마치 공포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지금도 오싹했다. 자기조차 그럴진대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난 그녀가 얼마나 두려움에 싸일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는 것이 힘이다는 말도 있지만 반대로 모르는 게 약이다는 말도 있다. 이런 경우엔 모르는 게 약일 것이다. 어차피 자기가 말하지 않아도 자연히 알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하림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남경희는 그제야 시간이 많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어머나, 내 정신 좀 봐. 이야기 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 지금 몇 시나 되었나요?”하림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았다.“아홉시 다 되어가네요.”“아, 가야겠네요. 미안해요. 너무 오래 방해를 해서....”“아뇨. 괜찮아요.”“아침엔 정말, 고마웠어요.”그녀는 일어나 의자에 걸쳐 놓았던 하얀 스카프로 옛날 영화에 나오는 여자처럼 머리와 얼굴을 감싸며 새삼스럽게 감사를 표했다. ‘초원의 빛’ 에 나오는 나타리우드가 떠올랐다.양철 지붕 위로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다시 크게 들렸다.서울에 있으면 아직 초저녁이었을 시간이 마치 한밤중처럼 여겨졌다.하림은 천천히 따라 일어나 그녀가 현관 쪽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말했다.“바래다 드릴까요?”“그래 주실래요?”남경희는 기다렸다는 듯 뜻밖에 선선히 응락을 하였다. 하림은 잠바를 걸치고 그녀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어둠이 검푸른 잉크빛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검푸른 잉크빛 어둠 속으로 바람이 윙윙 소리내어 불고 있었다. 춥지는 않았지만 을씨년스런 날씨였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김영현 기자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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