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詩] 송종규의 '북어, 바람을 필사하다'

여기 한 권의 책이 있다//가난한 애인들이 종이컵을 감싸안는 겨울 밤에/성에 낀 창가에 별빛이 달려와 수북수북 쌓이는 집요한 밤에//넘기지 못한 페이지처럼 낯선 발자국들이 해안선 쪽으로 달려갈 때//내가 아는 일군의 바다는 공중 높이 펄럭이며/진물 마른 자리마다 환한, 그 꽃핀 자리를 더듬더듬 읽어보는 것이다//이렇게 많은 빛의 손들이/시간의 층계마다 수천 겹의 앙상한 나뭇잎들이 고요히 엎드려있는 공중에//바람과 얼음을 주제로 천만 번의 필사를 거치고 나서/마침내 한 권의 책이 완성되었다//한 때 그는 극진한 푸른 빛의 일부였다 송종규의 '북어, 바람을 필사하다' ■ 나는 시를 읽는답시고 앉아 있지만 시는 무엇을 읽는가. 마른 북어 한 마리에 들어 있는 깊고 멀고 희미한 풍경을 더듬어 읽어 내는 순간을 따라가며 침을 꼴깍 삼킨다. 별빛이 수북수북 쌓이는 겨울밤에 북어는 무엇을 하는가. 사람들은 해안선 쪽으로 달려가지만 북어가 가득 매달려 있는 허공은 스스로가 떼 지은 바다의 일부가 아닌가. 바람이 불 때마다 바다는 북어의 흔들림을 따라 펄럭이며, 상처들이 말라 가는 자리마다 버짐처럼 꽃피는 바다의 소금자국들을 더듬더듬 읽는 광경. 우리는 북어라고 읽지만 사실은 하나의 책이며 책 속에 들어 있는 흥미진진한 언어이기에, 발음 그대로 book語이다. 북어가 얼다 녹다 다시 얼며 제 몸의 고집들을 다 털어 내는 그 풍경이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진실한 참회록이며 더할 나위 없는 경(經)이 아니겠는가. 그게 보이는가. 북어라는 하나의 책. 바다의 극진한 푸른빛을, 수천만 번의 죽음과 삶을 되풀이하여 필사해 낸 물고기 성자의 책과 말씀 한 마리.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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