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들의 사생활 - 5장 저수지에서 만난 여인 (88)

그리곤 그 또래 노인네들이 늘 하는 거짓말대로,“원. 늙으면 빨리 죽어야제. 요즘은 무릎도 성치 못하고.... 안 아픈 데가 없으니, 원.”하고 말했다.“할머니두....! 죽긴 왜 죽어요. 요즘처럼 좋은 세상에... 뵙기엔 아직 정정하신데 그래요.”하림 역시 돈 안 드는 말부조라 생각나는 대로 떠들었다. 부서진 의자에 엉덩이를 걸친 윤여사네 고모할머니는 손으로 가슴께를 쓰다듬었다. 시골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보통의 노인네나 다름없었지만 유난히 툭 불거져 나온 이마가 어딘지 모르게 고집스러워 보이게 했다. 그리고 여기저기 그녀가 살아온 세월이 만만치 않았다는 표시처럼 깊은 주름살이 칼자국처럼 패여 있었다. “할머니 물이라도 좀 드릴까요?”하림이 말했다.“아녀. 됐다우. 그딴 거 얻어 마실라고 온 건 아니니께.”대꾸하는 말투도 그리 곱지가 않았다. 어딘가에 가시가 박혀있는 성 싶었다.윤여사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그런 나이의 분들이 다들 한 아름씩 사연을 가지고 살듯이 우리 고모할머니 역시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지요. 원래 우리 고향은 윤가네 집성촌이었는데, 할머니가 젊었을 때 당시 동네 머슴으로 있던 우리 고모부님과 눈이 맞아 도회지로 야반도주를 했어요. 그리고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그땐 고모부님은 노름꾼에다 술주정뱅이로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했지요. 하나 있던 아들은 죽고, 딸은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가버렸다고 해요. 고향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고모부도 죽었어요. 그러나 고모님은 이미 오래전에 집안과 동네에서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장례식에도 별로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았어요. 그때 나는 어렸을 땐데 읍에서 고물상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고모부님 장례식에 갔던 기억이 나요. 팔월, 무척 무더운 날이었죠. 산비탈 밭에 피어있던 하얀 깨꽃이 기억나요....’아득한 옛날 이야기였다. 그때 그 바람 난 처녀가 지금은 호호 노인이 되어, 숨까지 색색거리며 하림이 자기 앞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무상한 게 세월이라더니 누가 있어 그녀의 처녀적 모습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윤여사, 아니 윤재영씨가 고모님 걱정을 많이 하더라구요. 죽은 개들 땜에 크게 상심하고 있으실 거라면서......”하림은 말이 나온 김에 넌지시 개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자기를 이곳까지 오게 한 직접적 이유도 거기에 있었던 게 아니던가. 그렇지 않아도 최소한 낼 모레는 한번 찾아뵈야지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당사자인 윤여사 고모할머니가 제발로 나타나주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을 터였다.개 이야기가 나오자 고모할머니의 인상이 지금까지완 갑자기 확 바뀌었다.“글쎄, 그놈의 영감탱이가 미쳤지!”울고 싶은 아이 뺨 때려준단 말처럼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쳤다.“불쌍한 우리 강아지 새끼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다니! 그게 어떤 넘들인데....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간이 벌벌 떨리는구먼. 영감이 껍데기만 사람 꼴을 하고 있지 속엔 마귀가 들어있는 게 틀림없다우. 마귀가....! 그렇지 않음 멀쩡한 짐승을 대낮에 총으로 쏴 죽일 수가 있겠남유?” 그렇지 않아도 샌 소리가 나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고, 갈라졌다.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김영현 기자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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