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혜정 기자]'5 4 3 2 1…땡!' 저녁 6시가 되면 직장인들의 눈은 시계에 고정돼 있다. 6시 십여분 전부터 엉덩이는 들썩이고 마음은 초조하다. 그러나 '칼퇴'(정시 퇴근)를 할 수 있는 '간 큰' 직장인은 드물다. 혹여 누가 칼퇴라도 할 때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회사 일을 나만 하는지 할 일이 산더미고 상사 눈치 보느라 칼퇴의 '칼' 자도 꺼내지 못한다. 야근을 해야 제대로 일을 한다는 '이상한' 인식도 문제다. 직장인들은 "습관적인 야근 문화"가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지난해 우리나라 직장인들의 근로시간은 평균 주당 41.4시간(상용근로자 5인 이상 사업체). 관련 통계가 구축된 1999년 이래 가장 낮은 수치라고 한다. 불황으로 기업들이 야근과 휴일 근무를 줄인 덕이라지만,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 사이에 놓고 보면 여전히 비교 불가 1위다. 2010년 말 기준 우리나라 연 평균 근로시간은 2256시간으로, OECD 평균(1764시간) 보다 1.3배가량 길었다. "열심히 살고 있구나"하고 스스로 위로할 수도 있겠지만 잘못된 야근 문화가 직장인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일과 중엔 놀고 야근 땐 한 잔 걸치고…"왜 이리 '월급루팡'이 많아?"= 지난해 입사한 첫발을 내디딘 신입사원 박모(27)씨는 얼마 안 되는 직장 생활 과정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직장 내 '월급 루팡(도둑)'이 많다는 점이다. 월급 루팡은 회사에서 하는 일 없이 월급만 축내는 직원을 일컫는 신조어다. 박씨가 몸담고 있는 팀 내 부장은 야근을 말 그대로 '밥 먹듯이' 한다. 점심을 먹고 난 후에는 코 골며 낮잠을 자고, 자다 일어나서는 몸이 찌뿌듯하다며 외근 나가는 척 사우나로 직행한다. 이럴 때 박씨는 생각한다. '오늘도 야근이구나.' 아니나 다를까. 5시가 넘어 사무실로 들어온 부장은 일이 많다며 자리를 지키고 앉았다. 야근한다고 다 같이 저녁을 먹고, 반주 한 잔씩 하다보면 8~9시는 우습다. 밥상머리 화젯거리도 업무가 아니다. 주식 이야기, 골프 이야기, 건강 이야기. 도돌이표를 찍고 나서는 한 시간 일하면 잘 할까, 이미 낮에 다 만들어놓은 자료 보고하고 끝이다. 박씨는 "야근할 생각을 하고 일은 대충하고 점심 때 놀다, 막상 야근 때는 저녁 먹으며 술 한 잔하고 피곤하다고 들어가는 식"이라며 "늦게까지 일을 한다고 잘 하는 게 아닌데 시간이 아깝다"고 털어놨다. ◆습관이 된 야근= 한 광고업체에서 일하는 김모 부장은 십수년간 '야근하는 문화'에 길들여진 습관을 한순간에 못 버리겠다고 털어놨다. 꼭 야근을 해야 할 상황이 아니지만 늦게까지 남아 일을 해야 일 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승진하는 즐거움에 몸이 부서져라 일한 결과가 이런 건가'라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일 한다며 등한시했던 가족과도 살갑지 않고 하니, 몸에 밴 습관처럼 회사에서 늦게까지 남아 일도 할 겸, 저녁도 먹을 겸 책상에 앉아있는다. ◆"일 잘 한다는 소리 들으려면 어쩔 수 없어"= A 업체 마케팅부서에서 일하는 이모 과장은 매일 곤히 자고 있는 아이들 얼굴만 본다고 하소연한다. 매일 야근에, 술 약속에 일찍 집에 들어가는 날이 손에 꼽힌다. 업무상 술 약속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야근을 할 때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업무가 밀려있는 것도 아닌데 부장 따라 사무실에 남아있어야 해서다. 혹여 먼저 간다고 하면 찍힐까 부장이 저녁 먹으로 가자고 하면 제일 먼저 따라 나선다. 이 과장도 항변할 이유는 있다. "같이 남아 야근을 해야 일 잘 한다는 소리를 듣죠. 야근하면서 하는 일은 없어도 늦게까지 있으면 일 잘 하고 열심히 하는 줄 알더라…." ◆"야근?…차라리 바짝 일하고 말지"= 올해로 입사 6년차인 임모(35)씨는 팀 내에서 야근 안 하기로 유명하다. 그렇다고 일을 게을리하는 건 아니다. 다른 팀원들이 야근을 핑계로 저녁 먹으러 갈 때 임씨는 자리를 지키고 앉아 묵묵히 밀린 업무를 처리한다. 이렇게 1시간 반 일을 하고 임씨는 바로 퇴근해버린다. 그 시각 다른 팀원들을 저녁을 먹고 8시께 들어와 일을 하기 시작한다. 시작이 늦으니 끝도 늦을 수밖에. 아무리 빨라도 10~11시는 돼야 집으로 향한다. 꽤 늦은 퇴근길에 이렇게 이야기한다. "무슨 일이 이렇게나 많은지 매일이 야근이라니까…." 임씨는 "1시간가량 바짝 일하면 끝날 텐데 저녁 먹고 커피 한 잔까지 마시고 나서야 잔업을 시작한다"면서 "일부러 일을 만들어 야근하는 것 같아 도통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야근 피하기 위한 변명도 가지가지= 이런 습관적인 야근 문화를 반영한 설문 조사 결과(2012년)도 있다. 한 영양간식 브랜드가 직장인 1139명을 대상으로 '직장인들의 퇴근 문화'를 조사한 결과다. 직장인들의 40%가 '회사 업무가 많아 칼퇴를 하지 못한다'고 했고 '칼퇴를 하지 않는 직장 분위기', '상사의 눈치', '야근을 하지 않으면 일하지 않는다는 부정적 인식' 등도 원인으로 꼽혔다. 이들이 하기 싫은 야근을 피하기 위해서 쓰는 비법은 '집안에 일이 생겼다고 말한다', '소개팅이나 선을 본다고 한다', '업무시간에 열심히 해서 일을 다 끝낸다' 등이 있었다.박혜정 기자 parky@<ⓒ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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