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선칼럼]병든 사회의 경고 '묻지마 범죄'

2003년 2월18일 오전 10시께 대구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 진천에서 안심으로 향하던 전동차 3호에서 불이 났다. 불은 순식간에 모든 차량으로 번졌다. 때마침 반대편에서 오던 차에도 옮겨 붙었다. 상ㆍ하행선 전동차 12량이 모두 타버렸다. 192명이 숨지고 148명이 다쳤다. 방화범은 지체장애 2급의 장애인 김모씨. 김씨는 경찰에서 "신병을 비관해 자살하려 했는데 나 혼자 죽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지난 일주일여 사이에 이처럼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이른바 '묻지마 범죄'가 잇따랐다. 지난 22일 여의도 국회 앞에서는 김모씨가 예전 직장 동료들을 찾아가 칼을 휘둘렀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행인 2명에게도 칼부림을 했다. 앞서 18일엔 의정부 전철역에서 유모씨가 객실에서 침을 뱉다 항의하는 승객들에게 칼을 휘둘러 8명을 다치게 했다. 경기 수원에서도, 울산에서도, 인천 부평에서도 비슷한 유형의 무차별 칼부림 사건이 벌어졌다.  칼부림을 한 이들은 대부분 무직자이거나 사회적 외톨이다. 여의도에서 난동을 부린 김씨는 4000만원의 카드빚을 진 신용불량자에 실직자다. 의정부역에서 흉기를 휘두른 유씨는 10년 동안 일정한 직업도, 집도 없이 떠도는 전형적인 '은둔형 외톨이'다. 울산의 이모씨 역시 3년 전부터 무직자로 혼자 방에 틀어박혀 지내왔다고 한다. 수원 살인 사건의 강모씨는 지난달 9일 출소한 뒤 막노동으로 살았다. 부평의 김모씨는 범행 하루 전날 실직했다고 한다.  묻지마 범죄는 감정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개인의 정신적ㆍ성격적 결함이 일차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사회ㆍ경제적 불안 요인이 드리워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경쟁위주의 불평등한 사회구조 속에서 쌓인 낙오자들의 불만과 좌절감이 사소한 계기를 통해 극단적인 분노와 증오로 표출된 것으로 봐야 옳다는 것이다. 묻지마 범죄는 바로 사회가 병들고 있다는 경고라는 얘기다.  2008년을 전후해 히키코모리(引き籠もりㆍ은둔형 외톨이)가 늘고 도리마(通り魔ㆍ길거리 악마) 사건이 잇따랐던 일본의 경우가 비근한 예다. '잃어버린 10년'의 후유증으로 양극화가 깊어지면서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던 일본의 젊은 외톨이들은 자신의 고통을 사회의 책임으로 돌리고 불특정 다수에 대한 공격적 행위로 분노를 터뜨렸다. 지금 우리 사회가 바로 그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경제는 활력을 잃어가고 청년실업과 비정규직이 늘면서 양극화의 그늘은 더욱 짙어지고 있다. 가계부채에, 전ㆍ월세란에, 물가고, 사교육비에 삶은 팍팍하기만 하다. 그 때문인가. 현대경제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 국민 중 절반가량(50.1%)이 자신을 저소득층으로 여기며 특히 98.1%가 '계층 상승이 어렵다'는 좌절감에 빠져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절망'의 사회, 그게 바로 우리의 현실인 셈이다. '절망'의 고달픈 현실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묻지마 범죄는 앞으로 더 늘어날 수 있다. 실직자가 늘고 생활고가 심해지면 불만이 쌓이고 그 원인을 자신이 아닌 사회의 잘못된 구조 탓으로 돌리려는 경향은 더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살인과 폭행, 자살 충동을 공공연히 털어놓는 카페가 버젓이 활동 중인 게 그 방증이다.  늦기 전에 묻지마 범죄를 심각한 사회 병리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해법을 찾아야 할 때다. 대선 주자들은 여야 할 것 없이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얘기하고 있다. 그 말을 할 때마다 꼭 새겨야 할 게 있다. 경쟁에서 밀려나 소외되거나 좌절하는 계층을 껴안지 못하는 복지,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주지 못하는 경제민주화는 공허한 구호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어경선 논설위원 euhks@<ⓒ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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