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 뛴 50년·뛸 50년]배고픔과 싸운 '朴統'…미래 먹거리 '차화정'을 키웠다

1964년 1월 수출진흥 정책 발표1차 경제개발 정책 공업화 중심 전환도로 화학 정유 공업 기반 조성 총력금융정책도 무역 뒷받침 위해 대수술수출보험법ㆍ수출입은행법도 시행1967년 GATT 가입해 관세 인하 협상
[아시아경제 박민규 기자] 1960년대는 한국 경제에 희망의 빛이 드리워진 시기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의 수출이 본격화됐다. 6ㆍ25 전쟁이 끝난 뒤 해외원조에 의존해오던 한국 경제는 1950년대 후반부터 원조물자가 크게 줄면서 암흑기를 맞았다. 1959년 한국의 수출은 2000만달러를 밑돌았다. 국민 1인당 고작 1달러를 수출한 셈이다. 반면 수입은 3억달러를 넘어서 심각한 무역수지 적자를 원조자금으로 충당해야 했다. 수출입 품목도 한정돼 있는 데다 무역 상대국도 몇몇 나라에 불과해 한국은 왜소한 무역 변방국에 머물러 있었다.당시 수출상품은 광산ㆍ수산물 등 1차상품에 국한됐다. 중석ㆍ흑연ㆍ무연탄 등 광산물이 60%를 넘어 제일 많았고 김ㆍ건어물 등 수산물이 20~25%, 생사ㆍ면직물 등 농축산물이 10~15%로 뒤를 이었다. 이들 상품은 주로 일본ㆍ미국ㆍ홍콩 등으로 수출됐다.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 따른 자유무역주의가 1960년대 꽃을 피우면서 세계 경제는 호황을 누렸다. 세계 무역시장 또한 유례없는 확대기를 맞았다. 특히 유럽 선진국들의 경제성장이 두드러져 연평균 6~10%대의 고성장을 기록했다. 반면 개발도상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오히려 줄어 경제 불평등이 심화됐다.한국은 1961년 5ㆍ16 군사정권의 등장 이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1966년)을 추진하면서 세계 무역시장에 의욕적으로 발을 담갔다.5ㆍ16 군사정권은 무엇보다 빠른 경제성장을 통한 빈곤 퇴치를 1순위 정책과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장면 정권 때 수립된 경제개발계획을 대폭 수정ㆍ보완해 강력한 계획경제 체제에 들어섰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기본목표를 '모든 사회적ㆍ경제적인 악순환을 시정하는 자립경제 달성의 기반구축'으로 정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중점 추진방향으로 ①농업생산력 확대에 의한 농가소득 증대와 국민경제의 구조적 불균형 시정 ②기간산업의 건설 및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③전력ㆍ정유ㆍ석탄 등 에너지원 확보 ④고용증대와 국토의 보존 및 개발 등 유휴자원의 활용 ⑤수출증대를 주축으로 하는 국제수지의 개선 ⑥저생산성 극복을 위한 기술 진흥 등을 추구했다. 이때만 해도 수출 진흥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당시 대부분의 신생 개도국이 그랬듯이 한국도 '수입대체 중심의 공업화 전략'을 추진했다. 그런데 공업화 추진 과정에서 외환부족 사태가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돌파구로 등장한 게 바로 '수출 제일주의'다.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1월 기자회견에서 이 같은 수출진흥 정책을 발표했다. 수입대체 전략을 버리고 수출주도 전략 중심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수정하면서 자립경제 대신 대외지향적인 공업화 전략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7~1971년)도 수출주도 전략을 계승했다. 기본 목표를 '수출주도형 공업화전략 하에서 산업구조의 근대화와 자립경제체제 확립'으로 잡았다. 중점 추진과제는 ①식량자급ㆍ산림녹화ㆍ수산개발 ②화학ㆍ철강ㆍ기계공업 기반 조성 ③수출증대와 수입대체 촉진을 통한 국제수지 개선 ④고용증대 및 가족계획 추진 ⑤영농의 다각화 및 농가소득 향상 ⑥과학 및 경영기술 진흥과 인력개발을 통한 기술과 생산성 향상 등으로 정했다. 1ㆍ2차 경제개발계획은 정부의 의지대로 성공적인 결실을 거뒀다. 산업구조가 농수산물과 광산물 등 1차상품 위주에서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중심으로 빠르게 바뀌면서 수출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또한 화학ㆍ철강ㆍ기계공업을 육성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도로ㆍ댐ㆍ전력 등 사회간접자본도 차차 갖춰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대외의존도 심화 및 경상수지 적자 누적 등 구조적인 불평등이 심화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이룬 경제성장 및 산업구조 근대화는 1970년대 고도성장시대를 여는 원동력이 됐다.경제개발계획은 우리나라 무역 관련 정책의 기틀을 잡고 세계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법적ㆍ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먼저 수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외환ㆍ금융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됐다. 수출촉진을 위해 가장 손쉬운 정책수단은 환율 조작(操作)이었다. 1961년 두 차례에 걸친 환율 인상과 함께 복수환율제를 단일고정환율제로 변경했다. 이후 1964년 다시 한번 환율을 두 배 가까이 올리고 단일고정환율제를 단일변동환율제로 바꿨다.1960년대는 수출 유전스(기한부 어음) 및 수출산업에 대한 외화대출 등 다양한 수출금융지원 제도도 만들어졌다. 무역 관련 법규도 대폭 정비됐다. 1967년 1월 새로운 무역거래법을 제정해 종래의 무역법ㆍ수출진흥법ㆍ수출장려금 교부에 관한 특별법 등 무역 관련 법규를 하나로 통합한 것이다. 이는 1986년 12월 대외무역법으로 대체돼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또한 1968년 12월 수출보험법과 1969년 7월 한국수출입은행법 등도 만들어졌다. 이와 함께 1967년 4월 GATT에 가입하고 GATT의 케네디라운드(관세 일괄인하 협상)에도 참가해 세계 무역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했다.수입을 억제해 무역수지를 개선하려는 정책도 추진됐다. 그러나 경제개발에 필요한 시설재와 수출용 원자재 수입이 불가피해지자 이들 품목에 대해서는 제한을 완화하는 선별적 수입억제 정책을 폈다. 아울러 수입제한 품목의 수입으로 얻는 폭리를 없애기 위해 특별관세제도를 도입했다. 불요불급한 상품의 수입억제를 위해 임시특별관세법도 만들어졌다.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착수된 1962년에는 수출진흥 전담기관으로 대한무역진흥공사(현 코트라)가 탄생하기도 했다. 코트라는 한국 수출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며 무역시장 개척의 첨병 역할을 해왔다.박민규 기자 yushin@<ⓒ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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