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저詩]김광균 '설야(雪夜)'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려//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에 메어/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희미한 눈발/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김광균 '설야(雪夜)' ■ 머언 곳에 한 여인의 옷 벗는 소리. 설야엔 늘 김광균의 귀만 남는다. 두근거리며 한 사람으로 향한 소리의 길, 풀어 벗는다. 홀로 부끄러움 없이 뜨거워진 몸을 열어 흘러내리는 비단자락. 소리를 감추는 소리의 소리. 뉘우칠수록 사무쳐 소리를 묻는 소리. 길을 묻는 길. 기별도 가지 않는 먼 곳 지우는 소리. 다만 지우는 소리였을 뿐, 옷벗는 그 여자 없었다. 닿지 않는 적막의 사이 눈 내리고 서러운 마음 사이 서리던 입김. 앵돋은 가슴 들썩이는 먼 곳의 뉘우침 따윈 없었다. 허튼 귀 저 홀로 먼 눈길에 서 있던 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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