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나무> vs <뿌리깊은 나무>│이 풍요로운 텍스트를 읽는 법

육두문자를 시원하게 내뱉는 왕, 왕의 대의를 비웃는 백성, 한글창제의 중심에 위치한 궁녀. SBS <뿌리깊은 나무>의 인물들은 일반적인 사극이 제시했던 스테레오 타입에서 한참 빗겨나 있다. 저마다의 의지로 움직이는 이들은 조선이라는 시대의 한계를 깨부수는 동시에 사극의 클리셰를 격파해 나가는 드라마의 가장 큰 힘이 되어준다. 이 풍요로운 텍스트를 두 명의 TV 평론가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조지영 TV평론가는 <뿌리깊은 나무>를 아버지의 굴레를 극복해가는 자식들의 이야기로 보았고, 김선영 TV평론가는 매체로 기능하게 될 한글의 역할에 주목했다. 이들의 시각을 길잡이 삼아 <뿌리깊은 나무>를 톱아보자. /편집자주<div class="blockquote">아버지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 죽은 아버지들은 살아있는 아들 딸의 삶에 끊임없이 개입한다. ‘한짓골 똘복이’(장혁)는 오직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으로 겸사복 강채윤이 되었고, 나인 소이/담이(신세경)도 아버지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는 자책으로 긴 세월 독한 불면과 침묵에 시달렸다. 정기준(윤제문)은 큰 아버지인 정도전의 설계했던 조선을 다시 찾아오고자 무려 24년 동안 백정 가리온으로서 살았다. 이도(한석규)는 어떤가? 그에게 아버지 태종은 공포 그 자체이자 극복의 대상이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들 모두 아버지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H3>아버지, 이해하거나 결별하거나</H3>
자식들에게 아버지란 최초의, 혹은 유일한 세계가 되기 마련이다. 강채윤과 정기준은 아버지 혹은 아버지가 구축한 세계에 애착 관계가 상당히 깊은 유형이다. 아버지의 세계는 무조건 옳고, 선하며 복원되어야 한다. 그 세계를 파괴한 자는 마땅히 징벌을 받아야 하니, 두 사람이 목표로 삼고 있는 사람은 결국 한 사람이다. 아버지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 즉 이도가 그 목표 인물이다. 이도의 몰락은 강채윤과 정기준의 이론적인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 목표가 된다. 그러나 이도의 입장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일단 아버지와의 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이도는 아버지의 유산을 이어받으면서도, 아버지의 방법론을 따르지 않기로 한 아들이다. ‘부강하고 강성한 조선’ 이라는 방향은 같지만, 그 길에 이르는 방법을 새로 찾아야 한다. 그래서 이도는 쉼 없이 갈등하고 자책하며 불면의 밤을 보낸다. 어느 모로 보아도 그에겐 패배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새로운 문자를 만들겠다는 그의 의지는 강채윤으로 대표되는 백성들의 지난한 삶을 바로 구할 수도 없는 듯 보이고, 정기준을 구심으로 하는 밀본의 막강한 조직력과 성리학적 원칙과 대적하기도 힘겨워 보인다. 무덤 속 태종 역시 비웃고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뿌리깊은 나무>는 후대의 역사가 다 알고 있는, 세종의 ‘위대한’ 승리담을 그리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더욱 주목하는 것은 갈등의 양상이며, 드러난 갈등과 맞서 싸우거나 설득하거나 그것을 봉합하는 방식이다. <H3>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H3>창조론과 진화론처럼, 공존이 불가능한 세계관이 있다. 저 편의 욕망을 무너뜨려야 이 쪽의 욕망이 전진할 수 있다. 정기준과 이도는 공존할 수 없다. 각자에겐 주어진 시대적 소명이 다르다. 정책적 노선도 다르다. 이 대결이 좀처럼 우열을 가리기가 힘든 것은, 양쪽 모두 나름대로의 설득력과 논리를 갖췄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팽팽한 대결에서 승부수를 쥐고 있는 것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강채윤이다. 이를테면 강채윤은 소비자이며 유권자가 된다. 이 세력과 연대하지 않으면 어느 쪽도 승리하기 어렵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계층은 누구의 손을 들어주게 될 것인가? <뿌리깊은 나무>의 등장 인물들은 신념만큼이나 욕망이 뚜렷하다.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켜줄 사람을 지지하고 보필한다. 그래서 <뿌리깊은 나무>는 보편적이면서도 논쟁적인 정치적 텍스트로도 읽을 수 있다. 재래의 사극이 오랫동안 답습해왔던, 선과 악의 대립이라는 간편한 구도가 이 드라마에는 없다. 선대의 유지를 받들어 ‘대업’을 이루겠다는 난세의 영웅적 자부심은 약하다. 그저 ‘지랄’ 같은 현실을 각자 믿는 방법으로 돌파해나가겠다는 뚝심이 부각될 뿐이다. 그 싸움에서 결국은 우위를 점하게 될 이도의 전략은, 결국 그가 아버지의 논리를 무조건 따르거나, 혹은 마냥 반대 방향으로 돌진한 것이 아니라 ‘다른 답’을 찾으려고 애썼다는 점이다. 어렵게 찾아낸 답이 거대한 시대적 공감을 불러일으킨 점이, 정기준이 세우려 했던 ‘재상의 나라’론(論)을 돌파해나간 비결일 것이다. 이도의 답이 옳아서가 아니다. 다른 답은 언제나 생소하고 불편하다. 당대에 균열과 혼란을 가져온다. 그것을 혹자는 혁신이라고도 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언제나, 그 혁신을 두려워하거나 매혹 당한다. <뿌리깊은 나무>는 슬쩍, 이런 질문까지 던지는 것 같다. 지금, 드라마를 보고 있는 당신은 어느 쪽이냐고. 글 조지영
<div class="blockquote">“넌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이도(한석규)의 어린 시절, 정기준(윤제문)이 그에게 던지고 간 말은 이 드라마의 전체를 관통하는 포박의 주문이 된다. 무술년 그 피의 날, 장인의 무고한 죽음 앞에서도 “전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며 눈물 흘릴 수밖에 없었던 이도만이 아니라, 똘복(장혁)과 담이(신세경) 역시 살해당하는 아버지들을 구하기 위해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그것은 단지 권력의 있고 없음의 문제를 넘어 애초에 그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모든 이야기와 역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자들이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비로소 시작된다.<H3>한글, 백성의 목소리를 담은 전복적 매체</H3>
“이도의 모든 것이 시작”된 날은 그가 아버지 태종(백윤식)에게 맞서면서 첫 백성 똘복의 목숨을 살리고 그의 조선에 대한 답을 찾은 순간부터다. 그는 조선이 강력한 힘으로 백성 위에 군림하는 군주의 국가가 아니라, 백성이 그들의 의견을 주체적으로 이야기하며 왕의 판관이 되어 함께 진보하는 국가가 되기를 꿈꾼다. 소이(신세경)에게 종이와 붓을 주며 “앞으로 그것으로 너의 의견을 적고 생각을 적으라” 했던 것처럼, 이도는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늘 주변의 생각을 묻는다. 이도가 그의 평생을 건 질문의 “끝은 글자를 만드는 것”이라 결심한 건 당연하다. 백성에게 스스로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매체가 없다는 것은 그들이 근본적으로 인식론적 문맹 상태에 있다는 뜻이며, 이는 곧 그들이 현실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글은 단순한 표현 수단을 넘어 자신의 목소리와 생각이 없던 백성이 주체적인 존재로 각성하게 만드는 힘이 된다. 소이의 변화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글자를 몰랐기에 사랑하는 이들을 죽게 했다는 자책감과 무력감에 괴로워하는 소이는 그 죄를 조금이라도 씻는다는 마음으로 이도의 한글 창제를 돕는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이름조차 말할 수 없는 존재였던 소이는 마침내 이름과 목소리를 되찾게 되고, 더 나아가 한글 창제가 곧 ‘자신의 대의’임을 깨닫는다. 반면, 똘복은 이도에게 글자야말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느냐 되묻는다. 그는 모든 이들 가운데 가장 무력하게 살해당한 반푼이 노비의 자식이며, ‘천 것’에게 가혹한 현실의 모순에 대해 뼛속 깊이 분노하는 자다. 하지만 이도의 표현대로 그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자”인 똘복이 이도에게 던지는 통렬한 질문이야말로 한글이 정말 백성을 위한 글자가 되는 데 판관의 역할을 할 것이다. 그가 아버지와의 환영 속 대면을 통해 상징적인 죽음을 맞이하고 ‘한짓골 똘복이’로 귀환하는 것은, 그 역시 곧 ‘자신의 대의’를 찾을 준비가 되었음을 말해준다.<H3><뿌리깊은 나무>가 대신하는 질문</H3><뿌리깊은 나무>에서 양반들이 왕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은 경연, 각종 회의, 상소문, 궐 밖 시위, 벽보 등 여러 가지다. 그러나 백성들은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매체가 없다. 그나마도 이도가 백성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노력마저 기득권층에 의해 여러 번 좌절된다.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실시했던 대대적인 여론조사는 관료들에 의해 조작 왜곡되고, 궐 안으로 부르는 것 또한 사사건건 견제를 받는다. 이도가 한글을 만든 이유는 결국 백성의 소리를 직접 듣기 위해서다. 그는 백성들이 “글자를 알면 답이 나오지 않았더라도 답을 더 많이 만드는 법을 알게 될 것”이라 말한다. 이는 마치 백성들 한명 한명의 목소리를 대안언론처럼 다루는 것이다. “윗 것들 대의가 자신들을 죽일 건지 살릴 건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봐야한다는 소이의 말이나 그들이 판관이 되어야 한다는 표현 역시 언론이 담당하는 역할과 같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질문과 많은 답의 합이 바로 이도가 세우려는 조선이란 나라다. 밑으로부터의 언론을 계속해서 통제하고 국민들에게 “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 시대에, <뿌리깊은 나무>는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을 대신 가르쳐준다. 글 김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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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선영(TV평론가) 글. 조지영(TV평론가) 편집팀 편집. 이지혜 seven@ⓒ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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