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단이 9개 대기업그룹(주채무계열)을 재무구조개선약정(MOU) 체결 대상으로 확정하면서 내달부터 고강도 구조조정이 시작된다. 지금까지 건설ㆍ조선ㆍ해운사에 대한 구조조정이 특정 업종에 국한됐다면, 대기업그룹 구조조정은 산업계 지도를 새로 그리는 대수술이 될 전망이다.
금융당국 고위관계자는 26일 "45개 주채무계열 가운데 재무개선약정 체결 대상이 9곳으로 결정됐다"며 "이번주에 채권단과 약정을 체결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당국과 채권단은 비밀유지 조항에 따라 해당그룹의의 실명은 공개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했다. 주채권은행별로는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6곳, 외환ㆍ하나ㆍ농협이 각각 1곳씩 약정을 맺는다.
삼성ㆍ현대차ㆍLGㆍSK 등 4대그룹은 약정 체결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주채무계열 순위 10위권 1곳, 11~20위권 1곳, 21~30위권 2곳 등 대형그룹이 포진해 있어 산업 전반의 파급효과가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대기업그룹 구조조정의 핵심은 단연 9곳 중 금융권 채무가 가장 많은 A그룹이다. 이 그룹은 최근 수년간 인수합병(M&A)의 신화로 회자될 정도로 공격적인 덩치 확장을 해왔지만 금융위기 이후 유동성 부족에 시달리고, 올 하반기에도 막대한 자금수요가 예상되는 상황이다. 일부 비핵심계열사와 자산 등을 매물로 내놓고 있지만, 이같은 방법으로 조달할 수 있는 유동성에 한계가 있다는게 금융당국과 채권단의 분석이다. 이때문에 M&A를 통해 편입한 계열사에 직접 메스를 가해야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부실계열사만 내놓아서는 재무개선도 되지 않고, 팔리지도 않는다"며 "상황이 어려운 곳은 알짜계열사를 내놓아야 실마리가 풀린다"고 말했다.
9곳 중 두번째로 채무가 많은 B그룹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약정체결 대상에 포함됐다. 다만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이 사모펀드(PEF)를 통해 우선매수권까지 주면서 계열사를 매입하는 방안을 추진중이다. 이밖에 C그룹은 일부 계열사 매각을 이미 완료해 앞으로 어떤 계열사와 자산을 추가로 내놓을지 주목된다. 과거 인수합병에 따른 외형확장 후유증을 겪고 있는 D그룹은 M&A를 통해 신규 진출한 사업분야 중 일부를 정리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채권단은 약정체결 대상에서 제외된 E그룹과 F그룹 등 2~3곳과는 자율협약을 맺을 계획이다. 하지만 자율협약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을 경우, 하반기에 재평가를 통해 약정 대상에 편입될 수 있다. E그룹은 환율급등에 따른 대규모 환차손으로 재무구조가 악화된 점이 반영돼 약정은 맺지 않았지만, 글로벌경기침체 지속에 따른 업황 부진도 무시할 수 없어 자구노력이 요구되고 있다.
금융당국은 이번 대기업구조조정이 외환위기때와 다른 방식이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채권단을 압박하는 수위는 연일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 김종창 금융감독원장은 25일 월간정책평가회의에서 "대기업들은 다 가지려고 하다 다 잃을 수 있음을 알아야할 것"이라며 "금융회사들도 소극적으로 대응하다 부실을 키울 경우, 은행장과 임원을 포함해 확실히 책임을 묻겠다"고 강조했다.
박수익 기자 sipark@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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