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노 파나마 대통령 "영토 주권 타협 안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파나마의 운하 통제권 환수를 경고한 가운데 파나마 정계가 거세게 반발했다. 트럼프 당선인의 미국 우선주의 칼날이 전통의 친미 국가인 파나마에까지 향하면서 외교 쟁점으로 비화할지 이목이 쏠린다.
호세 라울 물리노 파나마 대통령은 22일(현지시간) 엑스(X·옛 트위터)에 게재한 대국민 연설 영상에서 "파나마 운하와 그 인접 지역은 파나마 국민의 독점적 재산"이라며 "단 1㎡도 양보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국내 영토 주권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문제"라며 "운하는 당국이 완전한 자율성을 바탕으로 관리하는 자산으로서, 중립적이고 개방적인 운영을 사명으로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트럼프 당선인의 파나마 운하에 대한 통제권 환수 위협에 대해 파나마 정부가 발표한 공식 입장이다. 앞서 트럼프 당선인은 전날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트루스소셜을 통해 "파나마가 미국 해군과 기업 등에 과도한 운하 통행료를 부과하고 있다"고 비판한 데 이어 이날 애리조나에서 열린 정치행사 연설에서도 "관대한 기부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파나마 운하를 미국에 완전하고 조건 없이 돌려 달라고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1914년 완공까지 파나마 운하 건설을 주도했던 미국은 1977년 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이 체결한 조약에 따라 파나마 운하 통제권을 포기한 상태다. 전 세계 해상 무역의 3∼4%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진 파나마 운하는 연간 최대 1만4000척의 선박이 통과할 수 있는 곳으로, 2024 회계연도(2023년 10월∼2024년 9월) 기준 미국 선적 선박이 1억5706만t의 화물을 실어 나르며 전 세계 압도적 1위를 기록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러한 운하 이용에 따른 미국의 통행료 부담이 가중되자 트럼프 당선인이 압박을 가한 셈이다.
트럼프 당선인의 으름장은 파나마 정치권의 격앙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파나마 최대 야당인 중도좌파 성향 민주혁명당(PRD)은 이날 엑스에 "파나마 운하는 받은 게 아니라 우리가 되찾아 확장한 곳"이라고 역설했고, 파나마 국회 최대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무소속 연합에서도 "우리 민족의 기억과 투쟁에 대한 모욕"이라며 성토했다. 이 밖에 의원들도 독립 국가로서 자치권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현지 언론은 전했다.
파나마는 미국과의 대등한 관계 구축을 목표로 친미 노선을 타고 있는 전통의 우방국 중 하나다. 특히 지난 7월 취임한 물리노 대통령은 '다리엔 갭'으로의 이주민 행렬 억제와 관련해 미국 정부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다. 다리엔 갭은 남미 콜롬비아 북부와 중미 파나마 남부 지역 국경 지대에 있는 열대우림으로, 험난한 지형에도 미국·멕시코로 향하려는 불법 이민자들이 한 해에만 수십만명이 건너는 곳이다.
트럼프 당선인의 이번 발언에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도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트럼프 당선인은 "파나마 운하가 잘못된 손에 넘어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이는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한 발언이라는 게 주요 외신의 분석이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파나마는 2017년 대만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중국은 오직 하나"라고 선언한 바 있다. 현재 중국이 파나마 운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진 않고 있으나 홍콩계 기업 CK허치슨이 파나마 운하 지역에 투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진영 기자 camp@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