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서 '원자력 발전법' 초당적 지지
AI 열풍에 에너지 수요 폭증…원자력 관심↑
국가 안보와도 밀접…각국 속도
인공지능(AI)과 기후 변화에 대한 위기의식이 높아지는 가운데 미국이 원자력 발전에 속도를 내고 있다. 원자력 발전을 통해 친환경 에너지를 생산하는 동시에 러시아, 중국으로부터 에너지 안보 주도권을 가져오려는 전략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9일(현지시간) 초당적 지지를 받은 '원자력 발전법(ADVANCE Act)'에 서명했다. 원자력 에너지 산업을 강화하기 위해 원자력 발전소 허가를 위한 절차를 간소화하고, 원전 허가를 위해 기업들이 내야 하는 수수료를 줄이는 내용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앞서 지난 3월에는 폐로 원전 재가동 사업에 15억달러(약 2조원) 규모 정책 대출을 지원하기도 했다.
美 대선 앞두고도 초당적 지지받은 '원자력'
최근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당인 민주당과 야당 공화당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지만, 원자력 발전법은 이례적으로 초당적 지지를 확보했다. 원자력 생태계 재건에 양당이 힘을 모은 것이다. 친환경을 국정 기조로 삼는 바이든 행정부와 민주당은 원자력 에너지를 통해 화석 연료 의존도를 줄이면서 온실가스 배출량을 낮춘다는 계획이다. 공화당은 원자력 산업으로 인한 일자리 창출과 경제 성장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전기자동차가 함께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에너지 수요도 폭증하고 있다. 특히 AI에 필수적인 데이터센터는 '전기 먹는 하마'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다. 최근 구글 등 빅테크(대형 정보기술기업)들이 검색 서비스에 생성형 AI를 붙이려고 하는데 미국 전력연구원에 따르면 챗GPT는 기존 검색보다 10배 많은 전력을 쓴다. 라이스타드 에너지에 따르면 AI 지원을 위한 데이터센터 구축과 전기차 도입만 계산해도 2029년 말까지 미국에서 전기 수요가 290tWh 늘어날 전망이다. 이는 세계 18위 경제 대국인 튀르키예 전체의 전력 수요와 맞먹는 용량이다.
석탄, 석유 등 화석연료는 탄소를 배출해 기후 위기를 심화시킨다. 태양광이나 풍력 같은 신재생 에너지는 자연환경 변화에 영향을 많이 받아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어렵다. 발전 단가도 다른 에너지보다 비싸다. 원자력은 대규모의 전력을 안정적으로 생산하면서 탄소 배출이 없는 청정에너지로 주목받고 있다.
세계원자력협회(WNA)에 따르면 미국은 2022년 기준 7722억kWh에 달하는 에너지를 원자력으로 생산했다. 전 세계 원자력 발전량의 약 30%가 미국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원자로가 1970~80년대 세워진 것으로 노후해 세대교체가 시급하다.
AI 열풍에 산업계서도 원자력 발전 관심…빌 게이츠도
산업계에서도 원자력 발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미국 원자력 발전소 소유주의 3분의 1이 기술 기업과 전력 공급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AI 열풍으로 데이터센터가 늘고 전력 사용량이 뛰었기 때문이다. 아마존웹서비스(AWS)는 미국 동부 해안에 위치한 원자력 발전소에서 전력을 직접 공급받는 계약을 체결하기로 했다. 지난 3월 확보한 펜실베이니아 소재 원자력 기반 데이터센터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서다.
원전 투자도 활발하다. 대표적인 사례는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다. 그는 지난달까지 차세대 소형모듈원자로(SMR) 기업 테라파워에 10억달러(약 1조3770억원) 이상을 투자했고, 앞으로 수십억 달러를 더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CNN, CBS 등 미국 주요 언론과 인터뷰하며 원자력 알리기에 활발하게 나서고 있다.
게이츠는 청정에너지 생산을 위해 2008년 일찌감치 테라파워를 공동 설립했다. SK㈜와 SK이노베이션이 2022년 2억5000만달러(약 3443억원)를 투자하기도 했다. 테라파워는 지난달 미국 와이오밍주에서 차세대 SMR 착공식을 열었다. 테라파워는 삽을 떴지만, 아직 원자로 인허가를 받지 못했는데, 원자력발전법이 통과되면서 사업 추진에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청정에너지 넘어 국가 안보 밀접
원자력 발전을 확대하는 것은 미국만의 일은 아니다. 지난해 12월 '제28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에 참석한 한국과 미국 등 세계 22개국 대표들은 2050년까지 원전 설비 용량을 2020년 대비 3배 확대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에 서명했다.
각국이 원자력 발전을 확대하는 이유는 기후변화 대응을 넘어 국가 안보와도 밀접하기 때문이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자력 발전 부문에서 주춤했던 서방이 최근 들어 다시 속도를 내고 있다.
특히 유럽에서는 탄소 중립과 더불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원자력에 관심이 높다.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서다. WNA에 따르면 2022년 기준 프랑스는 전체 전기 사용량의 62.5%를, 헝가리는 47%를 원자력 발전으로 생산한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022년 2050년까지 신규 원전 최대 14기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올해 1월 다보스 포럼에서도 "AI 시대가 도래하며 전기가 더욱 중요해졌다"면서 "이에 대응해 원자력 발전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에너지 효율화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빌 게이츠도 원자력 발전의 에너지 안보 특성을 강조하며 미국이 글로벌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원자력 발전에 쓰이는 재료들이 군사 관련 활동에 유용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진영과 중국·러시아 간 에너지 안보 대결이기도 하다. 외신에 따르면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원자로를 확대하고 있다. 미국 에너지 정보청과 국제원자력기구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중국 원자력 발전소 용량은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올해 4월 기준 중국은 53GW(기가와트) 용량의 원자로 55개를 갖고 있다. 2014년에는 20GW 미만이었다. 또 현재 총 30GW 용량의 원자로 26개를 건설 중이다.
러시아는 글로벌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원자력 에너지를 이용하고 있다. 주요 외신에 따르면 러시아는 중국, 이란, 이집트 등 전 세계에서 건설 중인 신규 원자로의 3분의 1 이상에 관여하고 있다. 원자력 발전은 장기 프로젝트로, 일단 계약을 체결하면 장기간 우호 관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러시아 타스통신에 따르면 러시아의 국영 원자력 기업 로사톰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정상회담 이후 인도에 원자력 발전소 6개를 신규 건설하는 공동 프로젝트를 논의한다고 밝혔다. 또 지난달 푸틴 대통령의 베트남 국빈 방문에서는 로사톰이 베트남에 원자력 과학 기술 센터를 설립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며 베트남 원전 산업을 돕겠다고 밝혔다.
오수연 기자 syoh@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