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출자제한집단 48곳 중 '자수성가'12곳
한국 대기업 비중 OECD 국가 중 최하위권
대기업 비중 높은 나라가 성장률도 높아
한국경제가 급성장했던 1970~80년대 재계 서열 1위였던 현대그룹은 2016년 현대증권, 현대상선을 팔면서 중견기업으로 전락했다. 극동그룹의 극동건설, 극동정유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전까지 30대 대규모기업집단에 들어갔지만 이후 동서증권, 국제종합건설 부도로 중견기업이 된 뒤 웅진그룹에 팔렸다. 한때 대기업으로 맹위를 떨쳤다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중견기업으로 떨어진 업체들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한 상호출자제한집단 48곳은 대부분 고인 물이다. ‘뿌리’가 같은 곳도 많다. 범삼성(삼성·CJ·신세계), 범현대(현대차·HD현대·현대백화점·KCC), 범LG(LG·LS·LX)만 해도 10개나 된다. 36곳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대기업이거나 공기업, 조합이다. 반면 창업주가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자수성가형’ 대기업은 12개뿐이다. 2000년 이후 창업한 곳으로 한정하면 넷마블·카카오·쿠팡 등 단 3개로 줄어든다. 같은 시기에 삼보컴퓨터 같은 곳은 ‘대기업 명단’에서 자취를 감췄다. 강력한 후보였던 팬택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기업이 제대로 크지 못하는 국가는 경제 성장에 제한받는 것으로 드러났다. 대기업 비중이 높은 나라일수록 잘 사는 국가로 성장할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대기업 비중이 줄고 있는 한국이 경계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난달 21일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을 대상으로 대기업 비중을 조사한 결과 한국의 대기업 비중은 0.09%로 조사 대상 34개국 중 33위로 최하위권을 기록했다.
인구 100만 이상 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나라는 미국(0.88%)이다. 스위스(0.85%), 캐나다(0.80%), 뉴질랜드(0.48%), 독일(0.44%)이 뒤를 이었다. 반면 그리스는 0.07%로 최하위를 차지했다. 대한민국(0.09%), 이탈리아(0.10%), 포르투갈·슬로바키아(각 0.11%) 등이 하위 5개 국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에서는 종업원 수 300명 미만을 중소기업으로 분류하지만, OECD는 250인 이상 사업체를 대기업으로 분류한다.
2011년부터 2021년까지 10년간 명목 GDP 성장률 기준으로 대기업 비중이 ‘톱5’인 나라(인구 100만 이상)들은 모두 두 자릿수 성장을 기록했다. 미국이 49.4%였고, 뉴질랜드(48.4%), 독일(13.6%), 스위스(11.8%), 캐나다(10.8%)가 모두 성장률 10%를 넘겼다. 그러나 대기업 비중이 하위권인 나라들은 한국(44.5%)과 슬로바키아(16.6%) 정도만 선전했을 뿐 포르투갈은 한 자릿수 성장(3.5%)에 그쳤다. 심지어 이탈리아(-8%)와 그리스(-24%)는 오히려 ‘역성장’했다.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는 스페인과 함께 ‘PIGS’로 불리는 나라들이다. PIGS는 2010년대 재정위기를 겪은 국가들의 이니셜을 따서 지은 말이다. 스페인 역시 OECD에서 6번째로 대기업 비중이 작다. 스페인의 2021년 명목 GDP도 2011년에 비해 3.4% 감소했다.
PIGS는 10년간 GDP 순위 도약에도 실패했다. 이탈리아만 8위를 유지했고 스페인은 한 계단 떨어진 14위, 포르투갈은 5계단 하락한 49위였다. 그리스는 37위에서 52위로 내려가 낙폭이 가장 심했다.
한국은 대기업 비중이 작아도 10년간 GDP 성장률만 보면 선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최근 5년으로 기간을 좁히면 상대적으로 경쟁에 뒤처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2016년부터 2021년까지 명목 GDP 성장률은 20.7%로 뉴질랜드(32.3%), 캐나다(30.1%), 미국(24.7%), 독일(22.7%) 등 ‘톱5’ 국가들과 비교해 순위가 뒤떨어진다.
오유교 기자 5625@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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