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종 축구감독(62)은 수원 모처의 인터뷰 장소까지 차를 두고 걸어서 왔다고 했다. 오르막길을 20분가량 올라야 나오는 식당 겸 카페. 다 오르고 나면 등에 땀이 흥건해질 정도였다. 이 감독은 "30~40분 정도 되는 거리는 되도록 걸어서 가려고 하는 편"이라고 했다.
이 감독은 오랜 꿈은 청소년대표 감독이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그는 "언젠가 한 번쯤은 꼭 청소년대표팀을 맡아보고 싶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걷기 운동은 건강한 정신과 신체로 그 꿈을 이룰 언젠가를 위해 스스로 정해 지키고 있는 약속과도 같아 보였다. 그는 "난 청소년 선수들의 심정과 그 나이에 필요한 부분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며 "지금도 기회가 될 때마다 좋은 선수들을 많이 보러 다니고 있다"고 했다.
이 감독은 불운한 지도자다. 그는 1997~2018년 수원공고 감독으로 있으면서 박지성 JS파운데이션 이사, 김민재(나폴리) 등 걸출한 축구 스타들을 발굴해 키우는 등 지도력을 인정받았지만, 더 큰 무대에 오를 기회를 얻지 못했다. 프로팀은 물론, 대표팀도 그를 관심 있게 보지 않았다. 이 감독은 2002년 청소년대표팀 코치, 2006년 아시아학생축구 선수권대회에 나가는 대표팀 감독으로 잠깐 일한 적은 있지만 연령별 청소년대표팀의 정식 사령탑은 되지 못했다. 이 감독은 "러브콜이 왔다면 응할 생각이 있었지만, 제의가 없었다"며 "아이들을 가르친 지도자는 성인팀을 지도하지 못한다는 선입견이 축구판에 있었다"고 돌아봤다. 하지만 이 감독은 "나처럼 고교 무대에서 좋은 선수를 발굴하고 키워낼 수 있는 감독도 우리 축구에 늘 필요하다는 사명감으로 일해 아쉬움은 없다"며 "유소년 축구와 지도자들에 대한 인식, 제도가 계속해서 변화돼야 우리 축구가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감독님이 강조" 세세하게 쓴 일기… 박지성을 만든 힘
박지성 JS파운데이션 이사는 이 감독을 거쳐 간 선수 중 단연 최고 스타다. 이 감독은 "정말 성실하고 축구에만 집중했던 선수였다"고 회상했다. 박 이사의 일기장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일기장은 최근 '성공하는 메모'의 본보기로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된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썼던 일기는 고등학생이 되면서 더 세밀해지고 정교해졌다.
이 감독은 "(박)지성이는 일과 중에 축구에 관한 일을 꼭 일기에 썼다"며 "오늘 4대4 훈련을 했다거나 수비 3명과 공격 5명을 놓고 훈련했는데 '너무 힘들었다'고 쓰는 식이다. 근데 요놈이 재미있는 게 중요한 내용은 '감독님이 큰 소리로 강조하셨다'라고도 써놨더라. 내가 '시야를 넓게 확보하면서 공을 잡은 방법'을 가르쳐준 날이었다"고 했다.
훗날 박 이사는 이 일기장 내용을 자신의 에세이에 담으며 "이 감독님 덕분에 축구의 눈을 떴다"고 감사해했다. 이 감독은 "배운 내용을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일기는 선수들에게 훗날 큰 자산이 된다. 지성이 역시 그랬던 것 같다"며 "기분 좋은 일"이라고 뿌듯해했다.
"빠른 선수보다 느린 선수가 축구지능 더 높다" 느림의 미학
박 이사 등을 키워낸 이 감독에겐 그만의 선수 발굴 철학이 있다. '완성형'보다 '대기만성형'을 찾는다. 그가 주로 보는 선수들은 만 15세 이하의 중학생 선수들. 이 선수들이 고교에 진학한 후 3년간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지를 먼저 내다본다.
특히 이 감독은 "달리기가 빠른 선수보다 걸어 다니더라도 느린 선수가 더 낫다"고 말했다. 이른바 '느림의 미학'이다. 그는 "느린 선수들이 축구 지능은 더 발달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달리기가 빠른 선수들은 그것만 믿고 노력을 안 하는 경우들이 많다. 공을 몰고 달리기만 하면 수비수들을 제칠 수 있으니까 축구를 더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 느린 선수들은 공을 받고 두세 번 더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패스를 주고받으면서 동료를 이용하는 플레이가 된다."
세계적인 스타 리오넬 메시(아르헨티나)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포르투갈)의 희비가 엇갈린 것도 이 때문이다. 30대 후반에 이른 두 선수는 최근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메시는 여전히 유럽 무대를 종횡무진 누비지만 호날두는 축구의 변방인 사우디아라비아 리그로 이적했다.
유소년 키워내는 노년 지도자, 일본 축구의 원동력
최근 한국 축구는 일본에 연달아 지며 충격을 받았다. 성인 대표팀이 2021년 3월과 2022년 7월 두 번 연속 0-3으로 졌고 지난해 6월 16세 이하, 23세 이하 대표팀이 같은 스코어로 일본에 무릎을 꿇었다. 지난달에는 대학선발팀이 일본 도쿄도 사이타마현에서 열린 덴소컵 정기전 남자부, 여자부, 저학년부 경기에 나갔다가 모두 이기지 못했다. 그간 일본만 만나면 기세등등했던 우리 축구가 맥없이 무너진 것이다. 특히 결과, 스코어보다 화려한 기술로 중무장한 일본에 내용에서 밀려 우리 유소년 축구 시스템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도자들 사이에서 나온다.
이 감독은 1991년 울산 현대에서 코스모 석유 욧카이치로 이적해 활약한, 일본 진출 1호 한국 선수였다. 경험을 바탕으로 그가 본 일본의 원동력은 '노년 지도자'다. 이 감독은 "일본 선수들은 연령이 낮을수록 그를 가르치는 지도자의 연령은 높다. 거기에서 효과를 보고 있다"고 했다. 일본은 65세 인구가 4000만에 이르는 초고령사회. 축구도 영향이 불가피한데, 오히려 이를 좋은 기회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고령의 지도자는 젊은 사람들보다 경험이 많아 선수들을 보는 안목이 좋다. 어린 선수들은 기본기를 가르쳐 주는 수준이면 되기 때문에 많은 나이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그에 비해 젊은 지도자들은 경험이 적고 욕심이 커 당장 대회 성적을 위해 선수들의 기본기 교육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도 고령 지도자들이 계속 현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그들에 대한 인식을 바꾸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또 이 감독은 "일본은 옛날부터 브라질 축구를 접목해서 기술이 많이 발전했다. 최근에는 우리 강점이었던 힘, 근성까지 겸비해 더 강해진 것이다. 패스만 해도 우리와 차원이 다르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축구협회가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서로 맞대고 갈 길을 고민해야 하는데 무시해 왔다"면서 "유소년에 투자해야 한다. 그래야 좋은 선수들이 많이 나온다. 우리 축구는 10년 전보다 더 퇴보했다"고 안타까워했다.
김형민 기자 khm193@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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