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해병대 소속 '네바다 전초 전투'서 맹활약
'베가스 고지 전투'… 4톤의 포탄 보급·부상병 후송 임무 수행
[아시아경제 라영철 기자] 우리 땅에는 역사가 있고, 계절과 지역마다 추억과 문화가 있다. 본지는 전국 곳곳의 잘 알려지지 않고 숨겨진 이야기들을 찾아내고, 한반도의 아름다운 풍광과 작은 역사, 문화들을 소개하기 위해 '코리아루트'를 기획해 매 주말에 연재한다.
첫 번째 이야기는 올해 6.25 전쟁 71주년을 맞아 전쟁 영웅들의 뜻을 기리고 마을 문화사업으로 발전시키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마을의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을 다룬다.
한반도가 간직한 연천의 역사에는 호국영웅 정신을 계승하는 마을이 있다. 그곳 연천군 백학마을은 6.25 전쟁 당시 맹활약했던 용감한 영웅들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지게 하나로 전장을 누빈 '보급 영웅' 일명 '지게 부대'와 특히 제주도에서 태어난 경주마(馬) '레클리스(Reckless)'는 미 해병대에 배속돼 한국전쟁 네바다 전초전투에 참전해 전투마(War Horse)로 빛나는 전공을 세운다.
미국 100대 영웅으로 선정된 '레클리스'의 영화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미국 100대 영웅에 선정된 한국의 말(馬)
② 타고난 군마(軍馬) '레클리스'
③ 그 후 50년
② 타고난 군마(軍馬) '레클리스'
■ 전황(戰況)
'한국전쟁사(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와 '6.25 전쟁 1129일(이중근 저)'에 따르면, 1953년 봄. 미 국방부는 네바다 주에서 육·해·공군 2만여 명을 동원했고, 원자폭탄 실험 예정을 발표했다. 3월 5일 소련의 스탈린이 뇌출혈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전쟁은 급격히 종결로 치달으며 휴전협정에 집중됐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연일 휴전 반대 데모와 대중집회가 열렸다.
1953년 3월 26일 전쟁 발발 1006일째 밤, 중공군의 기습으로 미군은 베가스 전초와 레노 전초를 빼앗긴다. 바로 역습했으나, 탈환하지 못하고 결국 레노 전초는 보류하고 베가스 전초를 집중 공격해 탈환하기로 계획을 바꾸게 된다. '네바다 전초 전투(1953년 3. 26~30)'는 휴전 직전 미군과 중공군이 가장 치열하게 벌인 전투다.
군마(軍馬) '레클리스(Reckless)'도 미 해병 1사단 5연대 무반동포 소대 소속으로 '네바다 전초 전투'에 투입된다.
■ 경주마 '美 해병대'에 입대하다
1928년, 신설동 서울경마장에서 본격적인 경마가 시작됐다. 광복 이후 서울경마장은 하루 입장객이 4000명이 넘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당시로선 유일한 대중오락이었다. 경마가 있는 날엔 미 군정 사령관인 존 하지 중장과 이승만 대통령 등 당대 유명 인사들이 수시로 들렀고, 백범 김구 선생도 주말이면 거의 빠지지 않고 경마장을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한국 경마는 참혹한 전쟁 속에서 폐허가 되고 만다. 말과 종사자도 뿔뿔이 흩어졌다. 서울경마장의 역사는 전쟁으로 인해 그렇게 사라졌다.
'레클리스(Reckless)'는 1949년 7월 제주에서 태어나 경주용으로 서울경마장에서 활약하던 '아침해'라는 이름을 가진 신장 142cm 체중 410kg의 작은 암말이다.
금가현 레클리스 협동조합 총무는 "아침해는 피난길에서 수레를 끌다가 지뢰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소년 김혁문(17세)이 키웠던 말이다. 혁문은 지뢰사고로 다리를 크게 다친 여동생 정순과 계속된 피난길에서 우연히 미 해병 에릭 패더슨(Eric Pedersen) 중위를 만났고, 여동생의 의족을 해주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혁문은 패더슨 중위에게 250불(현재 가치로 약 400만 원)을 받고 '아침해'를 팔았다"고 전했다.
6.25 전쟁 당시, 미군은 한국의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고전하고 있었다. 패더슨 중위 부대는 한 개에 11kg 무게의 무반동총포탄을 여러 개 짊어지고 산길을 오갈 수 있는 동물이 필요했다. 아침해를 판매한 혁문은 아끼던 말이 전장에 가야 한다는 소식에 한참 동안 통곡하며 울었다고 기록으로 전해졌다.
'아침해'는 250불에 패더슨 중위에게 팔려오면서 미 해병대에 입대하게 된다. 당시 나이는 3세로 추정됐다.
■ 레클리스, '포화 속 전장'을 누비다
네바다 주에서 소집돼 한국전쟁에 참전한 장병들이 적군과 벌인 전투를 '네바다 전초 전투'라고 한다. '네바다 전초'란 현재의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매현리 지역인 '베가스', '레노', '카슨' 세 전초를 말한다. 연천군의 또 다른 전략 요충지 '후크고지 전투(사미천 전투)'도 유명하다.
금가현 총무는 "연천군 백학면 매현리는 현재 휴전선과 38도선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당시 전황도에 표기된 레노 고지, 카슨 고지, 베가스 고지가 군사분계선을 따라 위치한다. 서쪽으로는 개성 가는 길이며, 1.21 사태 때 김신조 침투로가 인접해 있고, 경순왕릉 뒷산 성거산 능선이 남방한계선과 인접하다. 우측 동편으로는 사미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당시 후크고지와 인접해 고지전이 가장 치열했던 곳이다"라고 전했다.
'SGT. RECKLESS' 기록에 따르면, '아침해'는 미 해병 1사단 5연대 무반동포 소대에 탄약 수송병으로 훈련받았다. 기동성이 뛰어나고 영리하며 용감함을 빗대 동료들은 '레클리스(Reckless)'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레클리스'는 산악 지형에서 일반 병사 10여 명의 몫을 해냈다.
전장에 투입된 '레클리스'는 6.25 전쟁 막바지인 1953년 3월 미군과 중공군의 마지막 전투인 '베가스 고지 전투(Battle for outout Vegas)'로 알려진 5일간의 전투에서 혼자서 총 56km에 이르는 가파른 산길을 51회를 오르내리며 한 번에 4~8개의 포탄을 386개를 실어 날랐다. 이날 사용된 탄약의 95%인 총 4톤이 넘는 포탄을 총탄과 파편이 쏟아지는 전장에서 혼자 운반했다.
'레클리스'는 전장에서 포탄 파편에 왼쪽 눈 위를 다치고, 왼쪽 옆구리가 찢어지는 등 2차례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치료를 받고 다시 임무에 복귀해 오히려 부상당한 병사들을 안전지대로 후송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해병대원들은 '레클리스'를 지키기 위해 입었던 방탄복을 벗어 보호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같은 모든 임무를 빗발치는 포화 속에서 말을 조정하는 기수 없이 '레클리스' 스스로 수행했다는 점이다. 다른 말들과는 달리 사람이 한두 번 만 동행하면 경로를 학습해 이후에는 혼자서도 길을 찾아 보급품을 전달했다. 철조망 같은 장애물을 피하고, 포탄이 터지면 바닥에 엎드리도록 훈련받아왔다.
한국전 참전용사인 하워드 E. 워들리는 "레클리스는 우리의 탄약을 지원해주는 생명선이었다"며 "엄청난 소음과 진동이 요동치는 전장에서 그(레클리스)는 놀라지 않고 견뎌냈다"고 증언했다.
배빗(Babbit) 상사는 "암갈색 몸매에 하얀 얼굴을 한 '아침해'가 총탄을 뚫고 생명과 같은 포탄을 날라주는 모습을 보고 모두 감동해서 사기가 진작돼 적을 괴멸시키는 원동력이 됐다"고 전했다.
'레클리스'는 포탄이나 부상병 수송 외에도 병사 12명이 짊어질만한 통신선을 메고 통신선 구축을 도왔고, 때로는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동료들의 방패막이가 돼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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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전 끝에 미군은 '베가스 전초'를 탈환하고 며칠간 이어진 재공격에도 끝까지 베가스 전초를 지켜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사상자 수는 1300여 명으로 추정되고, 미군도 118명이 전사하고 800명이 부상을 입고 실종 98명의 손실을 입었다.
라영철 기자 ktvko258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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