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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요일에 보는 경제사]조선시대 추석 '차례상' 비용은 얼마나 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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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불상에 차를 끓여 바치던 다례(茶禮)에서 유래
유교 예법서엔 아예 차례란 단어조차 나오지 않아
조선시대에도 국수, 떡, 술 한잔 올리던게 전부


[金요일에 보는 경제사]조선시대 추석 '차례상' 비용은 얼마나 들었을까? 퇴계 이황 선생 종가 차례상 모습. 유학자들은 차례를 속절이라 부르며 원래 화려하게 지내지 않았다.(사진=KBS 뉴스 장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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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추석 연휴 전후로 꼭 나오는 기사 중 하나가 '추석 차례상 비용' 기사다. 차례상에 보통 빼놓지 않고 올리는 것으로 알려진 사과, 배, 감 등의 과일이나 떡, 육전 등의 가격이 추석 전후로 갑자기 올랐다가 다시 내려가는 현상은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유교가 국시였던 조선시대에는 추석 차례상이 지금보다 훨씬 화려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 추석 차례상은 일반 제사보다 훨씬 간소하게 치러졌다. 추석 차례는 원래 유교예법에 따라 치러지던 예식도 아닌데다 제사 자체도 일부 대갓집 양반들을 제외하면 화려하게 하지 말 것을 권했기 때문이다.

차례는 글자 그대로 원래 '차(茶)'를 올리는 예였다. 그래서 다례(茶禮)라고도 많이 불렀는데 유교에서 나온 의식이 아니라 불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원래 삼국시대부터 차례는 설, 단오, 추석, 중구 등 이른바 계절별로 치뤄지는 사시제(四時祭) 때 각 절에 모신 부처와 보살들에게 차를 바치던 예식이었다. 고려시대 팔관회 연회, 사찰에서 주로 행하던 것으로 차와 함께 약간의 과일과 떡을 올리는 수준이었다.


[金요일에 보는 경제사]조선시대 추석 '차례상' 비용은 얼마나 들었을까? 원래 차례는 계절 명절마다 각 절의 불상에 차를 바치던 예식에서 비롯됐다.(사진=위키피디아)


이 예식과 함께 보통 '한가위'라 불리는 신라시대 가윗날 축제가 합쳐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가윗날 축제는 백중일은 음력 7월15일부터 가윗날인 8월15일까지 한달간 부녀자를 두 파로 나누어 서로 길쌈을 한 뒤, 생산량이 더 많은 팀이 승리하고 패배한 팀이 음식을 낸 뒤 서로 어울려 놀던 축제다. 여기에 중국의 중추절 풍습이 약간 첨가되면서 추석이란 명절이 생겨났다.


오히려 유교 관련 도서들에서는 차례란 단어조차 안나온다. 고려시대 대표적인 유학자인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는 물론 '고려사(高麗史)' 같은 역사서와 '주자가례(朱子家禮)', '가례집람(家禮輯覽)', '사례편람(四禮便覽)' 같은 유교의 대표적인 예법서에도 차례란 단어 자체가 없다. 또한 유교에서도 제사는 각 집안의 기제사를 훨씬 중요시여겼고 민간에서 전해져오는 이런 차례와 같은 사시제는 보통 속절이라 낮춰부르며 그렇게 큰 행사로 여기지 않아 간소하게 치렀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매월 초하루, 보름, 전통 명절에도 사당에 차례를 지내는 '행차례(行茶禮)'라는 예식이 등장한다. 이때도 새벽 사당에 단지 국수와 떡 등을 간소하게 차리고 술 한잔 올리는게 전부였다. 차례상 비용 같은게 따로 나올 정도로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리던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金요일에 보는 경제사]조선시대 추석 '차례상' 비용은 얼마나 들었을까? 현대 기본 추석 차례상 모습(사진=아시아경제 DB)


이러던 추석 차례가 갑자기 급이 격상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였다. 조선총독부는 1935년, 이른바 '의례준칙(儀禮準則)'이란걸 만들어서 제례를 통폐합시키고자 했다. 기제와 묘제 이외에는 설날과 추석 차례만 지내는 것으로 정하고 다른 제례는 모두 없애버린 것. 오늘날 행하는 차례 절차도 일제강점기때 만들어졌다. 강신(降神), 진찬(進饌), 단헌(單獻), 사신(辭神), 철찬(撤饌)의 절차로 간소화시켜버린 것.


이후 1938년부터는 일제가 총동원령으로 제사용 제기들까지 공출해가기 시작하면서 차례는 물론 기제사도 치르기 어려운 형편이 됐었다. 몰래몰래 지내던 제사나 차례에 대한 소중함이 더욱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이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 이후부터 제례에 각종 허례허식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1969년, 정부에 의해 가정의례준칙이 만들어졌다. 목표는 제례 전체의 비용축소와 간소화였다. 기제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2대까지만 봉사하도록 상한선을 정하고, 차례는 양력 1월1일 아침에 떡국으로 밥을 대신할 수 있게 한 연시제(年始祭)와 추석에 송편으로 지내는 절사(節祀)로 통일됐다. 1999년에 제정된 건전가정의례준칙이 다시 마련돼 설과 추석이 명절차례로 정해졌고, 성묘는 간소하게 하는 것으로 규정됐다.


우리가 제사나 차례상 기본차림으로 알고 있는 것은 모두 현대에 만든 이 의례준칙에 나온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율곡 이이가 유학에 갓 입문한 학도들을 위해 만든 '격몽요결(擊蒙要訣)'에도 추석 차례는 인절미를 시식으로 올리고 가을 시제로 사당에서 간략히 차례를 지내면 된다고 남겼을 뿐이다. 추석 차례상 비용이란 용어 자체가 모두 현대의 산물인 셈이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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