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민진 기자] 초등학생인 아들 녀석이 TV뉴스를 보던 중 물었다. "아빠, 군대 안가면 안돼요?" 국방의 의무가 이렇고, 저렇고 해봐야 답이 나올 것 같지 않고, 썩 마음에도 내키지 않아 "벌써 걱정할 일은 아니야"라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군' 관련 뉴스는 녀석을 예민하게 만드는 관심 사항 중 하나다. 합숙과 얼차려가 싫어서 운동부 생활도 그만둔 녀석이다. '공관병 전 싸대기'나 '공관병 자살기도' 등 뉴스에 등장한 단어들이 어린아이에게도 충격적으로 다가 온 듯 했다.
소설 '칼의 노래'의 유명세 때문이었는지, 범상치 않은 책 제목이 눈길을 잡아 끈 것인지, 소설가 김훈이 칼럼을 묶어 엮은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는 책 제목은 한동안 기억에 남았다.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아프고 괴롭겠지만 가서 대통령보다도 국회의원보다도, 그리고 애국을 말하기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보다도 더 진실한 병장이 되어라."
이 책이 나온 건 내가 예비군 훈련을 받던 총각 때였다. 그런 탓에 읽는 내내 필자인 '아버지'보다 '평발이라도 내밀어 어찌 해보고 싶었던 아들'에 더 감정이입 됐다.
박찬주 대장 부부의 공관병 갑질 논란을 보면서 23년 전 여단장 공관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유난히 연못을 좋아했던 그 여단장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 사병들은 삽으로 공관 주변에 연못 네 개를 팠다. 어떤 연못은 시멘트로 바닥을 바른 탓에 정기적으로 양수기와 양동이로 물을 퍼내 청소하고, 다시 물을 채워 넣는 일을 반복했다.
물을 다 빼내기 전에 연못의 물고기를 잡아 안전하게 모셔야 했다. 날씨가 쌀쌀해지면 발이 꽤 시렸다. 여단장은 오골계와 오리를 좋아하는 동물애호가(?)였다. 톱 한 자루 들고 산에 가서 적당한 나무를 베어 기둥을 세우고, 그물망을 둘러 공관 옆 기슭에 거대한 닭장을 만들기도 했다. 싱싱한 계란과 오리알을 가끔 빼돌려 먹는 게 그나마 재미였다.
우리가 공관 주변에서 작업할 때 빨간 추리닝을 입고 어슬렁거리던 공관병이 그때는 부러웠다. 그에게 어떤 사연이 있을지 살필 여유는 없었다. 전자팔찌를 차거나(그때는 전자팔찌가 있지도 않았지만) 전으로 싸대기를 맞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지나고 보니 추억이고, 무용담이었지만 그렇다고 유쾌한 기억이 될 리 없다.
군대는 포클레인 반나절 일거리를 수십 명이 삽 들고 며칠씩 '삽질'하는 곳이기도 하다. 대장 부부의 반인륜적 행태는 수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곳이 군대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동시에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느냐에 따라 희망을 발견할 수도, 개선의 여지가 없는 절망적 현실을 연장할 수도 있다.
오늘 퇴근하면 책장을 뒤져야겠다. 먼지 쌓인 김훈 선생의 글에서 아들에게 평발을 내밀지 말라고 할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김민진 기자 ent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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