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대학시절 '여자는 왜?'라는 주제로 1년 동안 매주 논단을 기획하고 글을 썼던 적이 있다. 페미니즘이라는 자칫 무거울 수도 있는 주제에 대해 나름의 시각으로 재미있게 풀어가자는 취지였다. 결국 '여자는 왜?'라는 물음의 해답을 '불평등에 대한 역차별'로 수렴해 나갔으며, 논단에 대한 여학생들의 항의만큼이나 여성 스스로 '그들의 행동'을 되짚어 보게 했다고 자평한다.
사전적 용어로 페미니즘이라 하면 여성뿐 아니라 남녀 '모두의 불평등'을 해소해나가는 일련의 사회 활동을 일컫는다. 용어상의 핵심문구는 누가 봐도 '불평등의 해소'지만 서로 같이 융화되고, 이해하며 살아가기를 표하기 보다는 남자들 때문에 이 지경까지 왔다는 책임론이 대부분이었으며, 시쳇말로의 적폐(積弊) 청산의 대상에는 늘 '남성'이 싸잡아져서 놓여지곤 했다.
일례로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독서토론 자리에 나온 남자들은 저마다 지은 죄 없이 고개 숙인 벙어리가 되곤 했는데, '내가 (남자이기로서니) 지은 죄가 도대체 무엇이길래……'라는 표정이었다. 입만 벙긋 했다가는 몇 안 되는 여자들로부터 뭇매를 맞을 분위기였던 것 같다. 나와 같지 않으면 적이라는 이분법적인 논리로 상황이 극으로 치 닿는 느낌이었다.
때론 이분법적인 논리가 각자의 주장을 단호하게 표현할 수 있겠으나 자칫 상대의 의견을 무시함에서 출발하는 오류가 되기도 한다. 상대가 의견 개진조차 망설이는 상황이 연출된다면 이는 대화라기 보단 잔소리나 일방적인 교육으로 보는 것이 가깝겠다. 설혹 내가 하는 말이 비록 나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마지막 발악이라 하더라도 남을 밟고 넘어가려는 행동은 99점은 얻을지 몰라도 만점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대화에 있어서 완전하지 않은 1의 마이너스가 논리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무서운 개가 짖는다'는 속담이 있다. 어스름 저편에 뭔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라도 있을까 싶으면 오히려 으르렁대는 것이 무서움을 타는 존재다. 실제로 그것이 다른 이의 의견을 묵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뭔가 반대급부가 나올 거라는 걸 사전에 시뮬레이션이라도 해본 듯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기의 주장을 끊임없이 내뱉는 모양새는 상대의 할까 말까 망설이는 소수의 의견을 한없이 부셔버린다. 나는 상대의 의견을 끌어내려 노력해본 적이 있던가? 나는 내 주장보다 상대의 입장을 간절히 들어보려 했던 적이 있었나? 난 그토록 완벽하고, 내 주장이 상대의 입을 막을 만큼 유일한가? 심히 퇴행(退行)의 대화법이다.
2017년 5월의 대한민국으로 돌아와보자. 거두절미하고…보수를 외치는 세력들은 어떤 취급을 받았던가? 진보와 중도를 외치는 반대세력은 저마다의 정치소신이 있어 그렇다 치더라도 수많은 일반 대중에게 있어 시청 앞에서 휘날리는 태극기 집단은 그저 세상 모르는 노인네들이 부역하듯 모인 우스개 집단으로 치부되지 않았던가.
연유야 있겠으나 '나는 맞고 상대는 틀리다'라던지, '다수가 맞으면 소수는 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선거기간 내내 씁쓸한 기분이었다.
'박사모'로 대변되는 그들이 무지때문이든 수십 년간 정치적 세뇌를 받아서 그렇든 그들을 폄하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으나 공유와 소통으로 대변되는 소셜미디어가 그 씁쓸함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누구라도 힘센 자는 상대를 애써 설득하는 기술을 발휘해야 한다. 주제야 어떻든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 창조적 집단사고)의 단계가 주어지고, 그 단계에서는 누구나 너그러울 수 있는 개성(個性) 대화의 시대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민경선 커뮤즈파트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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