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 읽기]카를 야스퍼스의 '죄의 문제'와 탄핵심판 선고를 보는 눈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광화문 촛불집회 5개월, 국회 탄핵 소추안 가결로부터 3개월여 만에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됐다. 어디선가의 환호, 또 그 어디선가의 눈물이 교차하는 가운데, 헌법재판소는 국회가 주장한 박 대통령 탄핵사유 중 최순실 국정농단 관련 ‘국민주권 위반과 법치주의 위반’만을 인정했다. 국가공동체의 대표자였던 박 전 대통령은 최순실 관련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줄곧 부인함과 동시에 역 비난을 쏟아내 왔는데, 이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하고, 최순실의 사익 추구를 지원한 사실임을 헌재에서 명확히 인정함에 따라 사실상 최순실이 온몸으로 부정한, 박 전 대통령과의 ‘경제공동체’ 실체를 법이 확인해준 셈이다.
무관심과 무책임이 초래한 '형사적 범죄'
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이 저지른 죄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 작업을 철학의 영역에서 풀어낸 카를 야스퍼스는 저서 <죄의 문제>에서 죄의 구분을 형사적 범죄, 도덕적 죄, 정치적 죄, 그리고 형이상학적 죄까지 4원적 도식으로 해석했다. 오늘 박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를 통해서는 ‘형사적 범죄’에 대한 단죄가 ‘파면’을 통해 이뤄진 셈. 파면 이후에도 검찰 특수본의 수사를 통해 대통령 불소추 특권으로 그간 피해온 소환 조사 및 불응 시 강제 구인이 가능하게 됐으므로 특검이 지난 6일 발표한 뇌물수수와 직권남용 등 13가지 범죄 혐의에 대한 박 전 대통령의 명확한 입장을 곧 확인할 수 있을 전망이다.
살아남은 자의 '정치적 유산과 죄'
탄핵인용에 따라 박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최초의 부녀 대통령이라는 영광과 함께 부녀가 나란히 취임은 했으되 퇴임은 못 한 불명예를 함께 안게 됐다. 정치인 박근혜의 자산은 곧 그 부친 박정희의 모든 업적에 기인해왔다. 브레히트가 읊조린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는 말은 강함과 무관한 상태로 ‘살아 남겨진’ 한 인간이 부모의 부재를 딛되 이들이 남긴 정치적 유산을 활용해 어떻게 강해지는가를 보여준 박근혜의 인생역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재구성됐고, 그 힘을 멋대로 남용한 최순실로 인해 국민의 선거참여로 선출된 정치공동체 대표로서의 권한을 저버린 박 전 대통령은 오늘 헌법과 법률의 준엄한 심판에 따라 대통령직을 박탈당했다. 그녀의 이름을 무기 삼아 정치적 세도로 위세를 떨친 ‘친박’ 정치인들, 그리고 국민이 선택한 대통령의 권한에 기생해 제 잇속 차리기에 골몰한 최순실과 배후세력에 대한 정치적 단죄 또한 이후 검찰 수사를 통해 조속히 이뤄져야 할 것이다.
부화뇌동한 통수권자로서의 '도덕적 죄'
외면적 단죄가 법을 통해 이뤄진다면, 내면적 단죄는 무엇으로 물어야 할까. 미르와 케이스포츠 설립, 플레이그라운드와 더블루케이의 설립과 지원에 재임 중 지속해서 관여했던 박 전 대통령은 최순실 관련 의혹이 본격화된 지난해 10월 5일 “어느 누구라도 재단과 관련해서 자금 유용 등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면 엄정히 처벌받을 것”이라 단언했으나 불과 닷새 뒤인 25일 1차 대국민담화를 통해 처음으로 최순실과 본인의 관계를 인정하며 “일부 연설문이나 홍보물 표현에 도움받은 적이 있다”고 시인한데 이어 2차 대국민담화에서는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발언으로 직접책임은 전가하며 본인 역시 피해자라는 뉘앙스를 보여 전 국민적 분노를 산 바 있다.
JTBC가 공개한 태블릿PC를 통해 백일하에 드러난 최순실의 국정농단 정황에도 박 전 대통령은 ‘오랜 인연’의 최순실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표현했는데, 이는 통수권자로서 국정운영에 사사로운 인연의 개입을 방기한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반증했다. 도덕적 죄는 오로지 스스로 성찰하고, 양심의 통렬한 반성을 통해서만 속죄할 수 있으나, 박 전 대통령은 탄핵 심판 선고에 대한 개인적 입장을 현재까지 전혀 밝히지 않은 상태다.
국민적 피로감과 예술인 탄압을 초래한 '형이상학적 죄'
야스퍼스 본인조차 형이상학적 죄의 성격을 규명함에 있어 <죄의 문제>에서 다소 모호한 입장을 취한 바 당대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는데, 오히려 박 전 대통령의 ‘형이상학적 죄’는 선명하고 뚜렷하게 드러난다. 본래 형이상학적 죄는 인간의 비참한 운명에 공명하는 예술가에게 영감을 부여함과 동시에 인간이 현존재로서 서로를 착취하며 살 수밖에 없는 한계상황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에 졸속으로 대응해 재난컨트롤타워로서의 정부 기능 마비로 국민의 생명을 지켜내지 못한 바 있으며, 세월호 참사 관련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의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을 기화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작성, 예술인의 생업마저 농단했다. 박 전 대통령 집권 후 벌어진 일련의 사태, 특히 최순실 국정농단을 통해 온 국민이 떠안았던 정신적 피로와 상대적 박탈감은 그 무엇으로도 씻어낼 수 없는 ‘형이상학적’ 상처로 깊게 남아있다.
<죄의 문제>는 전후 독일국민을 향해 국가폭력 안에서 국민 역시 자유로울 수 없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임을 인지하고, 내면의 각성, 그리고 처절한 반성과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한 철학자의 외침이었다. 오늘 헌재의 탄핵 심판 선고 서두에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은 “재판부는 국민들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에 따라 이뤄지는 이 선고가 국론분열과 혼란을 종식시키고 화합과 치유의 길로 나가는 밑거름이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오늘의 결정 역시 내일이면 곧 과거가 될 테지만, 과거의 고통만큼이나 미래의 희망을 위해 행동하는 국민의 발걸음만이 실존의 사회를 가능케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야스퍼스는 대통령 탄핵으로 기뻐하고, 또 슬퍼하는 오늘 우리 국민을 향해서도 통용 가능할, 서늘한 한 마디를 남겼다.
"만약 내가 있는 곳에서 불법과 범죄가 자행된다면,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나의 죄다."
디지털뉴스본부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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