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르팍쯤 바지 걷어 올리고
도랑물에 들어가면
겨우내 얼음장 밑
돌미나리 숲에 기대 살던,
여윈 송사리도 피라미도
보겠네,
얼음장 밑에서 겨울 다 견뎌 낸
작은 목숨들이 은빛 비늘 파르르
몸을 옮기겠네,
송사리도 피라미도
얼음 풀린 도랑에서 몸을 옮기며,
은빛 비늘
봄 햇살을 되비춰 내는
반짝, 반짝 되비춰 내는
은빛 햇살을 보겠네.
■ 시인은 한겨울에 봄을 옮겨 적는 사람이다. 시인은 한겨울에 봄을 옮겨 적기 위해 짱짱하게 언 도랑물 속으로 주저 없이 "바지 걷어 올리고" 들어서는 사람이다. 그래서 시인은 "돌미나리 숲에 기대 살"고 있는 "여윈 송사리도 피라미도" 마음을 다해 품는 사람이다. 그 따뜻한 온기로 "송사리도 피라미도"도 "얼음장 밑에서 겨울"을 견디는 것이다. 시인은 모름지기 그러하고 그러해야 하는 사람이다. 한겨울에 만난 이 시는 눈 맑은 시인이 저 봄날 "얼음 풀린 도랑에서" 미리 길어 올린 것이기도 하겠지만, 엄동설한 속에서 "은빛 햇살"을 "파르르" 끌어당겨 제 안에 새기고 안은 바이기도 할 것이다. "보겠네"에 쓰인 선어말어미 '-겠-'은 미래의 일이나 추측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주체의 의지를 뜻하기도 한다. 그런 맥락에서 이 시는 한겨울 속에서 "봄 햇살을 되비춰 내는" "은빛 햇살"을 싹틔우고자 하는 결곡한 마음의 생동인 것이다. 시는 미래를 선취하는 예지이자 현재 속에서 미래를 가동하는 실천이다.
채상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