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일터삶터] 얼굴이 있다

시계아이콘01분 29초 소요

[일터삶터] 얼굴이 있다 이윤주 에세이스트
AD

출근길의 대중교통에서 가장 하기 쉬운 일은 스마트폰도 아니요 게임도 아니며 쪽잠도 아니다. 사르트르의 외마디를 실감하는 일이다. “지옥, 그것은 타인이다!” 내 뒤에 바짝 붙은 누군가가 전날의 숙취와 구취가 섞인 트림을 한다. 재빨리 점퍼에 달린 후드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옷보다 머리카락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장막’이 필요해서다. 타인의 트림과 나 사이에.


비싼 값을 지불할수록 인간은 타인과의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 택시가 그렇고, 비즈니스 클래스가 그렇다. 인구의 밀도가 희박해지면 타인에게 너그러워지는 건 어렵지 않다. 나는 절로 너그러워질 만한 형편은 못 되는 쪽이지만, 그 자체는 괜찮다. 익숙해지면 그만이다. 다만 ‘같은 처지’끼리 미워하게 된다는 게 슬프다. 밟지 마, 밀지 마, 소리 내지 마. 정작 일평생 지옥을 경험할 일 없는 이들은 열차 승차권 발매기에 지폐 몇 장을 한 번에 집어넣기도 하던데.

타인의 지옥에는 얼굴이 없다. 무지막지하게 가까이 있지만 피상만 있기 때문이다. 타인은 만원버스의 승객이고 발등을 밟는 행인이며 뒤통수에 트림하는 밉상이다. 당연히 나도 (존재만으로) 마찬가지다. 승객이자 행인이자 밉상일 뿐인 우리에겐 얼굴이 없다. 고단하고 울적하고 종종 웃기도 하는 ‘인간’의 얼굴은 서로 지운다.


엄마는 한동안 층간소음에 시달렸다. 윗집에 두 살배기가 있는데 하루 종일 콩콩거린다고 하소연했다. 가서 직접 들어보니 두통이 생길 만도 했다. 게다가 밤 10시가 넘어가자 ‘콩콩’이 2배속이 된다. 엄마 말이, 아이가 종일 할머니랑 있다가 저녁에 부모가 퇴근하고 오면 좋아서 더 저런단다. 사정이 그렇다 해도 심하긴 했다.

그러고 나서 한참 뒤 엄마는 드디어 윗집 벨을 눌렀다. 결국 충돌을 피할 수 없나 했는데, 그게 아니라 엄마는 아이의 얼굴을 좀 보러 갔다고 했다. ‘콩콩’만으로는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그게 콩알만 한 아이의 소리라는 걸 알면, 그러니까, 콩콩대는 콩알의 얼굴을 알고 나면 좀 두통이 덜할 것 같아서. 할머니 품에 안겨 나온 아이는 물론 아이였다. 작고 보송하고 무구하며 뛰어다니는. 아이의 할머니는 연신 죄송하다고 했단다. 그러나 조부모들은 대개 손주들을 어쩌지 못하고 아이는 변함없이 뛰어다녔지만, ‘콩알의 얼굴’을 보고 내려온 뒤 엄마는 두통이 조금은 나아졌다.(고 했다.)


가끔 남편의 차에 실려 어디론가 가다 보면 대중교통만 지옥이 아니란 걸 알게 된다. 세상에 참 이상한 차들도 많다고 짜증을 내다, 아니지, 이상한 ‘차’가 아니라 저 안에 다 사람이 있지, 고쳐 생각하면 좀 머쓱하다. 노려보는 건 거대한 자동차의 궁둥이지만 저 안에는 어떤 얼굴이 있고, 그 얼굴 또한 고단하고 울적하고 가끔은 웃기도 하는데, 여기서 잠깐 깜빡이를 깜빡했을 뿐이겠지.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정현종, ‘방문객’ 中) 지옥 속에서 사람을 저런 마음보로 대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으므로 저 말은 말을 넘어 시가 되었을 테다. 그렇지만 가끔 뒤통수에 트림이 날아올 때 생각한다. 트림의 주인에게도 얼굴이 있다. 얼굴들은 일생을 가졌다. 어쩔 수 없이, 나처럼.


이윤주 에세이스트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놓칠 수 없는 이슈 픽

  • 25.12.0607:30
    한국인 참전자 사망 확인된 '국제의용군'…어떤 조직일까
    한국인 참전자 사망 확인된 '국제의용군'…어떤 조직일까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연출 : 이미리 PD■ 출연 : 이현우 기자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했다가 사망한 한국인의 장례식이 최근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열린 가운데, 우리 정부도 해당 사실을 공식 확인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매체 등에서 우크라이나 측 국제의용군에 참여한 한국인이 존재하고 사망자도 발생했다는 보도가 그간 이어져 왔지만, 정부가 이를 공식적으로 확

  • 25.12.0513:09
    김용태 "이대로라면 지방선거 못 치러, 서울·부산도 어려워"
    김용태 "이대로라면 지방선거 못 치러, 서울·부산도 어려워"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박수민 PD■ 출연 : 김용태 국민의힘 의원(12월 4일) "계엄 1년, 거대 두 정당 적대적 공생하고 있어""장동혁 변화 임계점은 1월 중순. 출마자들 가만있지 않을 것""당원 게시판 논란 조사, 장동혁 대표가 철회해야""100% 국민경선으로 지방선거 후보 뽑자" 소종섭 : 김 의원님, 바쁘신데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김용태 :

  • 25.12.0415:35
    강전애x김준일 "장동혁, 이대로면 대표 수명 얼마 안 남아"
    강전애x김준일 "장동혁, 이대로면 대표 수명 얼마 안 남아"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경도 PD■ 출연 : 강전애 전 국민의힘 대변인, 김준일 시사평론가(12월 3일) 소종섭 : 국민의힘에서 계엄 1년 맞이해서 메시지들이 나왔는데 국민이 보기에는 좀 헷갈릴 것 같아요. 장동혁 대표는 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고 계엄을 옹호하는 듯한 메시지를 냈습니다. 반면 송원석 원내대표는 진심으로

  • 25.12.0309:48
    조응천 "국힘 이해 안 가, 민주당 분화 중"
    조응천 "국힘 이해 안 가, 민주당 분화 중"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미리 PD■ 출연 : 조응천 전 국회의원(12월 1일) 소종섭 : 오늘은 조응천 전 국회의원 모시고 여러 가지 이슈에 대해서 솔직 토크 진행하겠습니다. 조 의원님, 바쁘신데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조응천 : 지금 기득권 양당들이 매일매일 벌이는 저 기행들을 보면 무척 힘들어요. 지켜보는 것

  • 25.11.2709:34
    윤희석 "'당원게시판' 징계하면 핵버튼 누른 것"
    윤희석 "'당원게시판' 징계하면 핵버튼 누른 것"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경도 PD■ 출연 : 윤희석 전 국민의힘 대변인(11월 24일)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에 출연한 윤희석 전 국민의힘 대변인은 "장동혁 대표의 메시지는 호소력에 한계가 분명해 변화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또한 "이대로라면 연말 연초에 내부에서 장 대표에 대한 문제제기가 불거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동훈 전


다양한 채널에서 아시아경제를 만나보세요!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