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의 대중교통에서 가장 하기 쉬운 일은 스마트폰도 아니요 게임도 아니며 쪽잠도 아니다. 사르트르의 외마디를 실감하는 일이다. “지옥, 그것은 타인이다!” 내 뒤에 바짝 붙은 누군가가 전날의 숙취와 구취가 섞인 트림을 한다. 재빨리 점퍼에 달린 후드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옷보다 머리카락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장막’이 필요해서다. 타인의 트림과 나 사이에.
비싼 값을 지불할수록 인간은 타인과의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 택시가 그렇고, 비즈니스 클래스가 그렇다. 인구의 밀도가 희박해지면 타인에게 너그러워지는 건 어렵지 않다. 나는 절로 너그러워질 만한 형편은 못 되는 쪽이지만, 그 자체는 괜찮다. 익숙해지면 그만이다. 다만 ‘같은 처지’끼리 미워하게 된다는 게 슬프다. 밟지 마, 밀지 마, 소리 내지 마. 정작 일평생 지옥을 경험할 일 없는 이들은 열차 승차권 발매기에 지폐 몇 장을 한 번에 집어넣기도 하던데.
타인의 지옥에는 얼굴이 없다. 무지막지하게 가까이 있지만 피상만 있기 때문이다. 타인은 만원버스의 승객이고 발등을 밟는 행인이며 뒤통수에 트림하는 밉상이다. 당연히 나도 (존재만으로) 마찬가지다. 승객이자 행인이자 밉상일 뿐인 우리에겐 얼굴이 없다. 고단하고 울적하고 종종 웃기도 하는 ‘인간’의 얼굴은 서로 지운다.
엄마는 한동안 층간소음에 시달렸다. 윗집에 두 살배기가 있는데 하루 종일 콩콩거린다고 하소연했다. 가서 직접 들어보니 두통이 생길 만도 했다. 게다가 밤 10시가 넘어가자 ‘콩콩’이 2배속이 된다. 엄마 말이, 아이가 종일 할머니랑 있다가 저녁에 부모가 퇴근하고 오면 좋아서 더 저런단다. 사정이 그렇다 해도 심하긴 했다.
그러고 나서 한참 뒤 엄마는 드디어 윗집 벨을 눌렀다. 결국 충돌을 피할 수 없나 했는데, 그게 아니라 엄마는 아이의 얼굴을 좀 보러 갔다고 했다. ‘콩콩’만으로는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그게 콩알만 한 아이의 소리라는 걸 알면, 그러니까, 콩콩대는 콩알의 얼굴을 알고 나면 좀 두통이 덜할 것 같아서. 할머니 품에 안겨 나온 아이는 물론 아이였다. 작고 보송하고 무구하며 뛰어다니는. 아이의 할머니는 연신 죄송하다고 했단다. 그러나 조부모들은 대개 손주들을 어쩌지 못하고 아이는 변함없이 뛰어다녔지만, ‘콩알의 얼굴’을 보고 내려온 뒤 엄마는 두통이 조금은 나아졌다.(고 했다.)
가끔 남편의 차에 실려 어디론가 가다 보면 대중교통만 지옥이 아니란 걸 알게 된다. 세상에 참 이상한 차들도 많다고 짜증을 내다, 아니지, 이상한 ‘차’가 아니라 저 안에 다 사람이 있지, 고쳐 생각하면 좀 머쓱하다. 노려보는 건 거대한 자동차의 궁둥이지만 저 안에는 어떤 얼굴이 있고, 그 얼굴 또한 고단하고 울적하고 가끔은 웃기도 하는데, 여기서 잠깐 깜빡이를 깜빡했을 뿐이겠지.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정현종, ‘방문객’ 中) 지옥 속에서 사람을 저런 마음보로 대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으므로 저 말은 말을 넘어 시가 되었을 테다. 그렇지만 가끔 뒤통수에 트림이 날아올 때 생각한다. 트림의 주인에게도 얼굴이 있다. 얼굴들은 일생을 가졌다. 어쩔 수 없이, 나처럼.
이윤주 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