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 정상의 신년사는 그 해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담는다. 정유년(丁酉年) 새해에도 어김없이 각 국 정상의 입에 이목이 쏠렸는데, 특히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발언은 화제를 모으기 충분했다. 평소 속마음을 드러낼 듯 말듯한 특유의 은유 화법을 쓰는 시 주석이 올해에는 예년과 다른 어조의 신년사를 내놨기 때문이다.
해마다 중국 국가기관이 밀집한 중난하이(中南海) 집무실에서 신년사를 발표한 관례를 깨고 만리장성 벽화 앞에 선 시 주석은 단호한 말투로 '주권'을 운운했다. 신년사에서 주권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온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명확한 대상을 향해 경고를 보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시 주석은 "우리는 평화 발전을 견지하면서도 영토 주권과 해양 권익을 결연히 수호할 것"이라면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 누가 어떤 구실을 삼더라도 중국인들은 절대로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 누구'는 미국을 겨냥한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에 미국이 간섭하는 데 대해 시 주석이 직접 불쾌감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댜오위다오(釣魚島·일본명 센카쿠 열도)를 놓고 중국과 오랜 기간 영토 분쟁을 빚고 있는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로도 읽혔다.
그렇다면 한중 관계가 지난 1992년 수교 이래 최악으로 멀어진 상황에서 우리는 시 주석의 신년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중국은 하루가 멀다 하고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한반도 배치 결정에 따른 보복성 조치를 내놓고 있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보복 움직임은 특정 기업과 업종으로 명확해지고 있는 데다 실질적 피해를 입히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중국은 사드 배치가 자국의 영토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규정지으면서 사실상의 배후로 미국을 꼽지만 괘씸죄 명목으로 우리에게 보복을 가하고 있다. 시 주석의 신년사는 이런 보복의 정당성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 돼 버렸다. 중앙정부가 가볍게 '눈짓'하면 지방 정부나 하부 조직은 알아서 기는 게 몸에 밴 나라라서 중앙당이 목표와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이면 당해 낼 도리가 없다. 당초 매뉴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치밀하고 일사분란하다. 최근 만난 중국의 저명한 원로 경제학자는 "한국의 사드 배치 결정은 중국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았다. 미국은 그저 중국을 견제하려는 수단으로 사드를 활용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처럼 사드를 빌미로 양국 간 외교 채널은 꽉 막혔고 한국은 사상 초유의 대통령 국정 공백을 맞아 안팎으로 진퇴양난의 모양새다. 한 외교 소식통은 "대국주의를 자처하는 중국과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한국의 국민 간 정서적 공감대마저 멀어져서는 안 된다"고 했다. 중국에서는 반한(反韓), 한국에서는 반중(反中) 감정이 꿈틀대는 것은 최소한 막아야 한다는 뜻인데 유일한 희망인 민간의 역할이 막중한 시기다.
베이징=김혜원 특파원 kimhye@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