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디좁은 방에
모처럼 더벅머리를 짧게 깎은
막노동꾼 서동 군이 드러누워
철 대문 삐걱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
구릿빛 물탱크엔 눈금을 알 수 없는 물이
호스를 타고 내려오는 소리
작은 네온등은 어느새 대문을 훌쩍 올라탔다
고동색 철 대문이 거북 껍질 무늬를 일으키고
바람은 호랑가시나무를 한 바퀴 돌았다
은밀한 서동 설화를 방관해 온
검은 개의 혓바닥은 늘어져서 노을에 뒤섞이고
여인숙 철문은 여전히 삐거덕거렸다
잠깐의 기행이 한 통의 편지를 쓸 동안
소도시 밀양은 아직 선화를 기다린다
어떤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 겹겹산을 넘어 황금을 옮길 수 있는
선화는 언제 오려나
수많은 그녀들이 마동이와 다녀간 흔적만
이부자리에 녹물로 남아 있다
■ 밀양에 가면 있나 보다. 아직 그런 곳이 있나 보다. 시외버스 터미널 앞이나, 어느 시장 뒷골목쯤에 가면, "작은 네온등"이 대문 위에 걸린 허름한 여인숙이 하나 있나 보다. "고동색 철 대문"은 녹슬고 낡아서 차라리 "거북 껍질 무늬"를 이룬 곳, '선화여인숙'이라는 여인숙이 하나 옹그리고 있나 보다.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을까, 아니면 다시 타지로 일하러 가려던 중이었을까. "모처럼 더벅머리를 짧게 깎은" 막노동꾼이 하룻저녁 깃든 곳, 이름도 고와라, '선화여인숙'. "철 대문"이 "삐걱거"릴 때마다 "선화는 언제 오려나"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는 "좁디좁은 방"들이 나란히 곁을 나누고 있는 그런 여인숙. 그러나 나는 저 설화 속의 재기 넘치는 영웅이 아니라서 그리고 당신은 온 나라가 다 아는 이쁜 공주가 아니라서 우리가 설핏 나눈 정은 다만 "이부자리에 녹물로 남"을 뿐이겠지만, 또한 그러나 오늘 하루만큼은 당신은 "수많은 그녀들" 중에 오로지 선화 공주가 되고 나는 마동이가 되어 꿈결처럼 한밤을 한생이듯 지피는 곳, 그런 곳이 있나 보다. 밀양에 가면 비록 비루하고 보잘것없는 생일지라도 마침내 당신을 만나 잠시나마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되는 곳, 우리의 진짜 역사가 비밀스러운 햇살 속에 "신력"처럼 대대로 이어져 온 곳, 그런 눈물겹지만 또한 고운 여인숙이 지금도 하나 있나 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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