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융성’이 국정과제의 하나로 등장하면서 문화가 산업과 결합되어 경제의 새로운 활력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던 국민들은 최근 이것이 몇몇 사람의 잇속을 챙기기 위한 눈가림으로 악용됐다는 어이없는 현실에 분노하고 있다. 정부의 문화정책이 추문에 휘말려 빛이 바랜다 해도, 국민들의 창의력과 추진력을 바탕으로 해 우리 문화와 경제의 한 축으로 자리 잡은 한류의 국제 위상은 흔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은 2012년부터 매년 재외공관의 도움을 받아 '지구촌 한류현황'을 파악해 자료로 펴내고 있다. 지난 11월 말 현재 전 세계 88개국에 1652개의 한류 동호회가 결성돼 있으며 전체 회원 수는 5939만명에 이른다. 1년 전 86개국 1493개 동호회, 3562만 동호인 규모에 비하면 엄청난 증가세이다. 통계를 분석한 사단법인 세계한류학회는 동호회란 것이 일반적 호기심 차원보다는 한 단계 깊은 관심과 흥미를 가진 팬층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활동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이 숫자의 증가는 한류의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지표가 된다고 평가한다.
2016년에도 한류의 주역은 최근 수년간의 추세와 마찬가지로 K-Pop, 한식, 드라마이지만, 한강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은 한국문학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줬으며, 그 외 웹툰, 패션 등 다양한 분야로 한류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는 모습이다. 해외에서 한류의 지속적 성공 여부는 전문분야 종사자들의 콘텐츠 다양화 등 끊임없는 노력과 정부의 정책 지원, 그리고 각국의 무역장벽과 같은 장애물을 제거해주는 외교적 뒷받침에 달려있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한류의 발원지이자 동력의 중심이라 할 일본, 중국에서의 한류와 관련한 최근 움직임과 전망은 매우 우려스럽다.
우선, 일본 내 한류는 양국 간 민감 외교 이슈에 영향을 받아왔다. 일본문화 수입개방 조치 이후 쌍방향 문화교류는 꾸준히 성장해 드라마 '겨울연가'를 정점으로 일본 내 한류가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2012년 8월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결과적으로 한일관계 전반의 경색과 함께 일본 내 한류의 급격한 내리막길을 초래했다. 군대위안부 문제 합의 이후 인적·문화적 교류가 미미하게나마 회복세라고는 하나, 8월 현재 도쿄 번화가의 한국 관련 점포수는 320개로 2012년 봄 500여개와 비교된다는 아사히신문의 최근 보도는 일본 내 한류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양국 정부가 주요 외교 사안을 잘 관리해 양국 국민 간 우호적 감정을 살려나가지 못하면 일본 내 한류의 재점화는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한편, 중국은 우리의 대내외 정책을 자국의 이해관계와 결부지어 13억 소비시장에 에 대한 한류의 접근권을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공개적이지는 않으나 사실상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를 빌미로 한류의 중국시장 접근을 다양한 방식으로 제재하며 우리 기업들을 옥죄고 있다. 이런 조치가 중국 내 한류 콘텐츠가 퇴출시키고 궁극으로는 한류 콘텐츠의 생산과 유통망을 '중국화' 함으로써 한국의 콘텐츠 생태계가 허물어질 위험까지 내포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심각한 우려이다. 중국정부 최고위층의 의중이 실린 외교 사안의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는 측면이 없지 않다 하더라도, 한류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 인식해 더 이상 민간에만 맡겨두지 말고 범정부차원의 정책적·외교적 대응방안을 조속히 취해나가야 한다.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는 한류는 조선, 철강 등 지난 세월 우리 경제를 지탱한 주력산업의 빈자리를 메우며 미래의 먹을거리를 제공해줄 진정한 '문화융성'의 결정판이다. 사이비 문화인들의 농단으로 쑥대밭이 된 문화정책 분야를 하루바삐 복원하고, 외교활동이 적시에 뒷받침해 한류 종사자들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
이시형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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