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법 시행 후 첫 명절…2017년 설 풍경
[아시아경제 지연진 기자, 오주연 기자, 이주현 기자]2017년 설(구정)을 사흘 앞둔 1월24일 서울시내 백화점 과일선물코너. 배 2개와 사과 3개가 포장된 작은 선물박스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지난해 여름 기록적인 폭염으로 수확량이 줄면서 과일 값이 뛴 데다, 같은 해 9월28일부터 일명 '김영란법'이라고 불리는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5만원 이하 선물을 구성하다보니 사과와 배 수량이 대폭 줄어든 것이다. 인근 수산코너에선 '영광 참굴비'가 3마리 포장판매됐다. 지난해 추석까지 10마리에 20만원에 팔리던 제품이다. 대형마트도 마찬가지다. 9900원짜리 참기름 세트와 1만9000원 짜리 생활용품세트 등 저가의 선물은 그나마 판매가 됐지만, 한우, 굴비 등의 고가 선물세트를 찾는 발길은 크게 줄었다. 선물판매가 대폭 줄면서 배송량이 줄어든 택배기사 일부는 대목인 명절에 쉬는 신세가 됐고, 작년 설까지 택배기사들로 문전성시로 이뤘던 국회 의원회관은 방마다 '선물을 정중히 사양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안내판이 내걸렸다.
김영란법 시행 이후 첫 적용되는 명절인 내년 설 미리 본 유통업계의 풍경이다. 고가의 선물을 주로 팔던 백화점과 제조업체는 김영란법의 선물 한도금액인 5만원 이하의 선물구성을 위해 내용물는 대폭 줄이고, 5만원 이하의 선물비중을 크게 늘일 전망이다. 이미 유통업계에선 김영란법 시행 전 마지막 명절인 이번 추석부터 한우선물세트 비중을 줄였다. 롯데백화점의 경우 2014년부터 올해 구정까지 명절마다 한우세트 비중이 25% 이상으로 가장 많았지만, 올해 추석에는 건강세트에 1위 자리를 내줬다.
직격탄을 맞은 한우농가는 망연자실했다. 황엽 전국한우협회 전무는 "소규모 농가 위주로 이미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면서 "앞으로 더 힘들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라고 하소연했다. 유통업계의 우려도 마찬가지다. 백화점 관계자는 "백화점 선물세트 구매자 가운데 공직자 비중은 파악이 안되지만 상당한 영향을 받지 않겠느냐"면서 "김영란법 시행으로 명절선물을 주고받는 풍습마저 사라질까 우려된다"고 토로했다. 제조업계에선 내년 설 선물매출이 10~20% 가량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특급호텔들은 '5만원대 상품 개발'과 '기존 고가선물 유지'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특급호텔서 가장 인기있는 명절 선물세트 가격은 20만~100만원대. 그러나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5만원 이하의 선물 수요가 늘 것으로 보고 있어 각 호텔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업계는 올 추석 선물세트 판매량 추이를 보고 판단하겠다는 입장이다.
일부 기업들은 이미 김영란법을 시행 중이다. 한 대기업 대관업무 담당자는 이번 추석을 앞두고 소관 정부부처에 명절선물을 보내지 않았다. 국회에는 의원회관이 아닌 의원과 보좌진들의 자택으로 선물을 배송했다. 5만원대 선물이지만, 구설수에 오를 수 있는 탓이다. 이 관계자는 "부처 공무원에게 올해 선물을 못 보내 미안하다고 전화를 했더니 오히려 고마워하는 분위기"라며 "내년부터는 선물을 아예 안할 것"이라고 전했다. 또 다른 대기업의 대관 담당도 "올해는 정부나 국회에 선물을 안보냈다"면서 "김영란법 시행을 앞두고 벌써부터 서리가 내린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국회 한 보좌진은 "벌써 의원회관에 오는 선물 자체가 줄었지만 이마저도 3분의1가량은 반송하는 것 같다"고 했다.
유통업계는 요즘 김영란법 시행 전 마지막 명절특수를 누리고 있다. 오히려 올 추석이 '마지막' 이라는 분위기 때문에 판매량이 늘어난 것이다. 롯데백화점은 지난달 26일부터 9일까지 추석선물상품 매출이 전년대비 15.8% 늘었고, 같은 기간 현대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도 각각 8.6%와 6.2% 증가했다. A호텔은 기존 30만~150만원대 고가상품 판매량이 10~20% 증가했다. 택배물량의 경우 지난해 추석대비 4.3%가 늘면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지난 5일 하루에만 무려 195만 상자가 접수돼 우체국 택배 사상 하루 치 물량 최고치를 경신했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양극화가 뚜렷했다. 고가의 한우나 굴비선물세트의 매출은 신장폭이 적거나 오히려 줄어든 반면, 중저가의 건강식품이나 생활필수품 매출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롯데백화점은 건강식품과 생활필수품 매출성장율이 각각 38.8%와 22.1% 늘어난 반면 한우와 굴비는 각각 9.7% 느는데 그쳤다. 현대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도 사정은 비슷했다. 이마트에선 지난 7월27일부터 판매된 선물세트를 집계한 결과 초고 인기세트인 한우갈비와 한우혼합세트 매출이 각각 12.9%와 16.2% 감소했다. 한 백화점 판매원은 "택배비까지 포함해 5만원 맞춤형 선물이 가장 인기가 많다"고 전했다.
지연진 기자 gyj@asiae.co.kr
오주연 기자 moon170@asiae.co.kr
이주현 기자 jhjh13@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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