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는 '살아 있는 시체'다. 한 때는 홍콩 영화에 나왔던 창백한 강시가 대표격이었다. '콩콩' 뛰면서 사람을 쫓아다니는데 부적을 붙이면 움직이지 않고 도사의 명령에 따르기도 한다. 강시 영화가 인기를 끌자 귀여운 캐릭터의 어린 강시도 등장했었던 기억이다.
좀비는 서아프리카 지역의 부두교에서 사람을 죽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약을 먹인 후 환각 상태로 만들어 노예로 부렸다는 주술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러다 1968년 조지 로메로 감독의 영화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사람을 물면 물린 사람도 좀비가 되는 전형이 만들어졌다.
최근의 좀비는 강시에 비할 바 없이 훨씬 기괴하고 현실적이다. 몇 해 전 브래드 피트가 나오는 영화 '월드워Z'를, 사전에 내용도 모른 채 봤다가 동행했던 아내에게 "나를 왜 이 지경에 처하게 했느냐"는 극심한 추궁을 당한 적이 있다. 아내는 좀비물을 끔찍하게 싫어하는데 좀비가 온 지구를 덮었으니 그럴 만도.
이번에는 '부산행'을 혼자서 봤다. '월드워Z'에 이어 또 한 번 '좀비의 물결'이었다. '곡성' 같은 영화는 보는 내내 공포에 멱살을 잡힌 채 이리저리 휘둘리는 느낌이었다. 생각해보면 좀비도 어지간한 공포의 대상이지만 좀비 영화는 액션물에 가깝다. 잡히면 나도 좀비가 된다는 극한의 감정이입이 심장을 쫄깃하게 한다. 사람이었지만 어차피 죽은 몸에 불과한, 괴물이 되었기에 마음껏 후려치고 걷어차도 괜찮은 대상이기도 하다.
좀비 영화는 왜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또 흥행하는가. 좀비는 유력한 상징이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김봉석, 임지희씨가 함께 쓴 책 '좀비사전'에는 "인간의 본능적인 분노가 세상을 파괴하는 것처럼, 조지 로메로의 좀비영화에서는 '욕망'이 모든 것을 파괴한다. 좀비의 식탐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이 종말을 이끈다고 '랜드 오브 데드'는 말하는 것"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번 돈으로 이자도 못 낼 정도인 기업을 비유할만큼 좀비는 일상적인 용어가 됐다. 그런데 살아있으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 어디 '좀비기업' 뿐이겠는가. 굳이 대중을 개ㆍ돼지로 보는 관료가 아니더라도 돈이나 권력에 영혼을 판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 차고 넘칠 것이다. 양심이나 측은지심을 인간성의 요체라 본다면 현실에도 좀비의 물결은 도도하다.
좀비가 무서운 것은 엄청난 확장성이다. 미친 듯이 달려들어 물어댈수록 그 수는 폭증한다. 물리면 끝장이다. 뛰어야 산다. 저 유리문을 빨리 닫아야 한다. 유리문 저 편에 동료나 친구, 혹은 가족이 있다고 해도.
박철응 기자 hero@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