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여성, 남성=생계' 이분법 여전…신청때부터 눈치, 아직도 쉽지 않아
[아시아경제 이현주 기자] 나는 용기를 내 인사부와 우리 부서 팀장님께 차례대로 면담 신청을 했다. 인사부에서는 규정상 육아휴직이 가능하다고 했다. 쉽게 풀리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팀장님과의 면담은 쉽지 않았다. 당시 대학원 수업을 계속 듣고 있었는데, 그 기간 동안에는 육아휴직이 불가능한 것 아니냐는 예상치 못한 질문을 들었다. 그렇게 인사부 및 상급자들과 논의해보겠다는 내용으로 1차 면담을 마쳤다. 관련 내용을 알아본 결과, 회사 업무가 없는 주말에 대학원을 다니고 있기 때문에 육아휴직 불가 사유는 되지 않는다고 했다. 다행히 이 부분이 해결됐지만 2차 면담에서는 내가 맡은 업무를 대신할 사람을 채용하는 문제가 쟁점이 됐다. 팀장님은 우리 집에 특별한 문제가 있거나 아이가 아픈 것도 아닌데, 육아휴직을 신청하는 것에 거부감이 든다고 했다. 그 말이 이해는 됐지만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아이와 집안에 큰 문제가 있어야만 육아휴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려고 육아휴직을 하는 게 아닐까?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육아휴직 관련법과 회사 규정을 들며 내 의지를 전했다. 결국 휴직을 시작하기 일주일 전에서야 최종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고현철·35·○○코리아 재직)
'아빠 육아휴직·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체험 수기집'에서 발췌한 글의 일부다. 고씨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아빠들은 육아휴직을 신청할 때부터 어려움을 겪는다. 주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구구절절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상급자를 직접 설득해야 하는 과정은 가시밭길의 연속이다. 사례집을 살펴보면 자신이 회사 내 첫 육아휴직자여서 '부부 합산 1년만 가능하다'고 말하는 등 인사팀 직원들도 육아휴직 규정을 잘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러나 최근 육아휴직을 선택하는 아빠들이 늘어나고 있다. 서로 동기는 다르지만 한 가지 목표, '진짜 아빠'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는 것이다.
6일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남성 육아휴직자는 지난해 4872명으로 2012년에 비해 2.7배 더 늘어났다. 육아휴직은 만 8세 이하 초등학교 2학년 이하의 자녀가 있는 경우 최대 1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제도다. 남녀 구분 없이 사용이 가능하다.
최근 남성 육아휴직자가 대폭 늘어난 것은 '아빠의 달'이 도입되면서 남성의 육아휴직 참여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아빠의 달은 엄마가 육아휴직을 사용한 후 같은 자녀에 대해 아빠가 육아휴직을 사용하면 첫 3개월 육아휴직 급여로 통상임금의 100%(최대 150만원)을 지원하는 제도다. 엄마, 아빠의 순서가 바뀌어도 같다. 육아휴직자의 직장유지율도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유지율은 59.5%로 2012년에 비해 2.2%포인트 올랐다.
정부는 육아휴직을 비롯한 일·가정 양립을 위한 여러 제도적 방안을 모색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양성평등적 시각을 지향하고 있다. 여성만 혜택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남녀 모두 동등하게 누려야 한다는 의미다.
인사혁신처와 행정자치부는 이를 위해 지난해 11월 남성 공무원 육아 휴직 기간(기존 1년)을 여성과 동일하게 3년으로 개선했다. 특정 성별에 우위를 줘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불임과 난임 휴직 대상을 여군에서 군인으로 확대해 임신과 출산을 할 때 부성(父性)권 지원을 강화했다. 또 법무부는 엄마의 인적사항을 알 수 없는 경우 가정법원의 확인을 받아 미혼부도 출생신고를 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정했다.
앞으로도 이 같은 제도가 더욱 자리 잡기 위해서 정부는 법과 제도를 개선할 방침이다. 특히 '육아는 여성의 것'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각종 제도를 이용할 때 여성은 특권을 누리는 것처럼 보여 지고 남성은 눈치를 보는 문화를 소멸시켜 나가겠다는 것이다.
이같은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면 일·가정 양립을 위한 유연근무제도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을 것으로 예상된다. 임희정 한양사이버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는 "일·가정 양립이 잘 돼 있는 선진 국가들의 경우 육아 부담이 여성에게만 국한되지 않아서 육아휴직이나 시간선택제와 같은 유연근무제가 반발 없이 자연스럽게 도입이 되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여성의 것이라는 인식이 강해 도입을 할 때 문제가 생기고 있다"며 "남녀 근로자가 모두 쓸 수 있는 제도라는 인식의 전환과 함께 조직 문화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현주 기자 ecolh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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