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조5000억 쏟아붓고도 사망선고 받은 STX조선…무엇이 문제인가
무법 법적근거 없이 채권단 자의적 판단·官의 입김이 발단
무책임 '돈에 대한 의사결정' 책임규명 없어 도덕적 해이 불러
무리수 비즈니스모델 대신 유동성 위기에 집착…제도 잘못 이용
[아시아경제 구채은 기자] STX조선이 법정관리 수순을 밟게 되면서 자율협약 제도의 실효성에 대한 논란이 커지고 있다. 4조5000억원이란 천문학적인 돈을 지원받고도 관(官)의 입김, 채권단의 자의적 판단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애초에 의도했던 시장 논리가 제대로 작용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구조조정을 할 때는 '돈에 대한 의사결정' 이 중요한데 자율협약은 권한과 책임이 명확지 않다보니 효율적으로 작용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문가들이 가장 먼저 지적하는 것은 자율협약 근거 법의 부재다. 법이 없다보니 구조조정을 둘러싼 수많은 의사결정이 책임규명 없이 자의적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워크아웃은 '기업구조조정촉진법', 법정관리는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통합도산법)'에 각각 근거가 있다. 반면 자율협약은 법적 구속력 없이 채권단과 기업 간 협의로 진행한다. 금융당국과 국책은행, 구조조정 대상 기업 경영진 등의 도덕적 해이가 개입될 소지가 크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자율협약 방식은 말 그대로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채권자 간, 채권자-채무자 간의 사적 계약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감독당국을 비롯한 외부의 암묵적 개입이 이뤄질 가능성이 더 농후하다"고 지적했다. 한 금융권 관계자도 "지금 현재 이뤄지는 자율협약은 금융위가 실을 여기 저기로 당기고 국책은행과 금감원이 꼭두각시 서는 형태로 이뤄지고 있는 게 현실"이라면서 "당사자가 주도하는 형태의 자율협약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STX조선의 경우 일시적 유동성의 위기가 아닌 비즈니스 모델의 문제였는데도 불구하고 성급하게 자율협약이 추진돼 구조조정을 실기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오정근 건국대 교수는 "STX조선이 자율협약을 신청했던 2013년 4월은 금융위기와 유로존 위기 직후였고 선박 수주 전망 자체가 불투명했다"면서 "일시적 위기 대처가 아니라 강도높은 구조조정이 필요한 때였는데도 불구하고 자율협약이 추진된 것은 당시 산은 등 국책은행들이 '내 임기만 피하자'(not in my termㆍNIMT)는 생각으로 구조조정을 지연하고 책임을 방기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국책은행들이나 채권은행들이 당장 강도높은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법정관리나 워크아웃보다 시간을 끌고 구조조정을 지연하는 선택지로 '자율협약'이 악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도 있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자율협약 자체가 밑빠진 독에 돈을 쏟아붓는 제도로 악용되선 안된다"면서 "대우조선해양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자율협약이 대기업 위주로 자의적으로 이뤄지는 구조조정 방식이라는 점도 문제다. 김 교수가 산업은행이 채권을 갖고 있는 99개 구조 조정 기업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워크아웃과 법정관리가 진행 중인 기업은 각각 43.4%, 자율 협약이 진행 중인 기업은 13.1%로 나타났다. 그런데 자율협약을 진행 중인 기업의 자산은 99개 구조 조정 기업 총자산의 48.9%에 달했다. 자산규모가 큰 대기업 상당수가 구조조정 과정에서 자율협약을 적용받는 셈이다. 김 교수는 "자율협약이 대규모 기업에만 선택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은 구조조정의 투명성ㆍ책임성을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아울러 자율협약은 워크아웃보다 대외신인도의 훼손이 적은 반면 법적 구속력 없이 채권단과 기업만 참여해 협약 내용을 결정하기 때문에 자율협약에서 결정된 사항을 채권단 이외의 채권자, 노동자가 받아들이지 못해 지난한 분쟁이 일어날 수 있다.
다만 전문가들은 자율협약 제도 자체를 이용하는 방식이 문제이지 제도의 성격 자체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아시아나항공이나 금호산업, 대한전선과 같이 자율협약을 졸업해 구조조정에 성공하는 경우도 있다. 오 교수는 "모든 구조조정을 법으로 옭아맬수도 없는 문제"라면서 "자율협약에 들어가는 조건을 조금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구채은 기자 faktu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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