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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은 왜 기적이 되어야 하나

시계아이콘읽는 시간2분 10초

나눔의 집에서 봉사하던 중 강일출의 그림 보고 영화 기획
14년간 7만5270명이 제작비 지원 "아베 총리 꼭 봤으면 하는 일본 분도"

'귀향'은 왜 기적이 되어야 하나 영화 '귀향'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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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할머니, 우리 사진 찍어요. 남는 건 사진밖에 없잖아요." 영옥(손숙)은 손녀뻘 은경(최리)의 제안을 거절한다.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연행된 뒤 처음 밟은 고향 땅. 모든 것이 변했지만 그의 아픔만 그대로 남았다. 영희(서미지)라는 이름을 버리고도 지워지지 않은 상처. 영옥은 "암보다도 무섭다"고 했다. 그런데 못이긴 척 허락한 사진을 촬영할 때 슬며시 미소를 보인다.

조정래 감독(43)의 영화 '귀향'에서 절정에 이르기 전에 배치된 이 신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일본군 위안부는 1991년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실명으로 희생자임을 밝히면서 실체가 드러났다. 커밍아웃 이후 나눔의 집 할머니들은 하루에만 일곱 매체 이상을 맞았다. 악몽 같았던 기억을 곱씹으면서도 일본의 만행을 알리려고 했다. 그러나 6개월가량이 흐르고 그곳을 찾는 발길은 뜸해졌다.


'귀향'은 왜 기적이 되어야 하나 영화 '낮은 목소리3-숨결' 스틸 컷

변영주 감독(60)은 1993년 나눔의 집을 자주 드나들면서 다큐멘터리 촬영을 제안하지만 거부당한다. 하지만 끈질긴 요청 끝에 허락을 받았고, 7년여에 걸쳐 '낮은 목소리' 3부작을 완성했다. 그는 마지막 편 '숨결(1999년)'을 내놓으면서 "할머니들이 나를 받아들인 건, 위안부 시절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사실 할머니들을 위한 배려가 아니었다. 무서워서 질문을 못했다"고 했다.


변 감독은 할머니들이 합정동에서 혜화동으로 이사를 가던 날, 조감독 한 명을 잃었다. 짐을 싸는 모습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 조감독은 이사를 돕던 변 감독에게 "당신은 이거 못 찍을 거다"라고 단언했다. 변 감독은 상실감에 빠졌지만 자세를 바꾸지 않았고, 기어코 할머니들이 카메라 앞에서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을 포착했다. 피해자이면서도 죄인마냥 조용히 웅얼거릴 수밖에 없었던 할머니들의 사연. 그것은 낮은 소리이니 오히려 더 주의 깊게 들어달라는 묵직한 요청이었다.


'귀향'은 왜 기적이 되어야 하나 영화 '귀향' 스틸 컷


'낮은 목소리' 개봉 뒤, 할머니들은 달라졌다. 나눔의 집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조정래 감독은 강일출 할머니(89)가 미술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그린 '태워지는 처녀들'을 접하고 영화를 계획했다. 할머니들은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조 감독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는데 밝게 웃어주셔서 당황했다. '우리의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셨다"고 했다.


조 감독은 할머니들을 취재하면서 얻은 증언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촬영으로 이어가는 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만나는 제작사마다 고개를 내저었고, 기업들도 투자를 꺼렸다. 그 혼자만의 고충이 아니었다. 당시 위안부를 소재로 영화를 계획한 감독은 열 명 이상이었다. 모두 촬영에 이르지 못하고 작업을 접었다. 조 감독은 "대부분의 제작사들이 '위안부가 우리나라에서 황금 소재인데 다뤄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냐'고 반문했다"며 "이런 소재는 절대 돈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너무나 뼈아팠다"고 했다.


'귀향'은 왜 기적이 되어야 하나 영화 '귀향' 조정래 감독


조 감독은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황혜진 교수에게 300만원을 지원받아 간단한 영상을 만들었지만 제작과 투자에 계속 난항을 겪었다. 오히려 모욕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일본과 거래하는 기업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시나리오를 던지며 '위안부가 가짜'라고 할 때는 분노를 억누르기 힘들었다. 어떤 분은 '문제제기 방식이 잘못됐다. 전쟁이 나면 원래 여자들은 그렇게 이용되게 마련'이라고 했다. 이런 치욕을 견디는 할머니들을 위해서라도 꼭 영화를 완성하고 싶었다."


삐딱한 사회의 시선은 영화에도 등장한다. 영옥은 텔레비전을 통해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에 대한 조사와 신고 등록을 한다는 뉴스를 접하고 동사무소를 찾는다. 그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려다 동사무소 직원의 말에 마음을 바꾼다. "이런 걸 당해도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신고하겠어." "그래, 내가 그 미친년이다. 우짤래."


'귀향'은 왜 기적이 되어야 하나 영화 '귀향' 스틸 컷


조 감독은 크라우드 펀딩으로 7만5270명에게 지원을 받아 순제작비의 절반이 넘는 12억원을 해결했다. 명단에서는 일본인이 다수 발견된다. 조 감독은 "익명으로 1만엔(약 10만8000원) 이상 내놓은 분이 꽤 많다"고 했다. 귀향은 지난 13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비공개로 진행한 시사회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조 감독은 "생각보다 반응이 뜨거웠다. 아베 신조 총리(62)가 이 영화를 꼭 봐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분도 계셨다"며 "모두 일본에서 꼭 개봉해달라고 손을 내미셨다"고 했다.


귀향은 오는 24일, 14년 만에 국내 극장에 걸린다. 조 감독은 "주위에서 14년의 세월이 고통스러웠냐고 많이들 묻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을 생각하면 그렇다고 할 수 없다. 할머니들은 70년이 넘는 세월을 고통 속에서 지내고 계신다"고 했다. 지난 15일 시사회에서 귀향을 관람한 이옥선 할머니(90)는 "우리는 이만큼 살았기 때문에 이런 영화도 볼 수 있지만 먼저 간 할머니들은 얼마나 한을 품고 갔는지 모른다"며 "우리는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고 했다. 박옥선 할머니(93)는 "영화를 보고 나니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며 눈물을 흘렸다.


'귀향'은 왜 기적이 되어야 하나 영화 '귀향' 스틸 컷


귀향은 이들의 영혼을 달래는데 의의를 두고 있다. 영옥은 자신과 함께 위안소에 끌려갔지만 끝내 돌아오지 못한 친구 정민(강하나)을 떠올리며, 정민과 같은 나이의 소녀 은경에게 씻김굿을 부탁한다. 조 감독은 원통한 마음을 푼다는 의미로 영화 후반에 모시나비를 넣었다. 한반도에 가장 폭넓게 분포한 이 나비는 윤곤강의 시 '나비'를 떠올리게 한다. 일제 치하의 고통스런 삶에 만신창이가 된 우리민족을 날개 찢긴 늙은 나비에 투영했다. 조 감독은 이 나비에 날개를 다시 붙여 하늘로 훨훨 날려 보낸다. 그는 "일본으로부터 진정성 있는 사과도 받아야겠지만 무엇보다 국민이 아픈 역사를 직시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아픈 영혼들이 온전하게 돌아올 수 있다"고 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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