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응용개발→양산→판매와 마케팅 단계로 이어지는 선형적 혁신 모델(linear innovation model)이 상호작용 혁신 모델(interactive innovation model)로 전환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이제는 진부하게 느껴진다. 이제는 연구개발을 시작하기 전부터 판매를 전제로 하는 크라우드 펀딩 시스템과 3D 프린터 등 빠른 프로토타입핑 툴들이 등장해서일까?
이미 융합도 진부한 단어다. 학문과 학문, 산업과 산업, 기업들의 전문 영역, 민간과 정부의 역할을 서서히 희미하게 만드는 빅블러(big blur)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전문기업은 점차 사라지고 구글과 같이 가장 빠른 혁신의 수단인 인수합병(M&A)을 통해 다양한 분야에 진입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미국의 비영리 민간재단인 하워드휴즈 재단은 정부보다 오랜 20년 이상의 기초연구 분야 장기 지원을 통해 다수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들을 배출하고 있기도 하다.
이 뿐만 아니라 기술의 빠른 발전, 오픈소스와 공유문화는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을 넘어 새로운 시장을 만드는 동시에 기존시장을 신속하게 대체하는 빅뱅 파괴(big bang disruption)도 등장했다. 기존 카메라와 CD 플레이어 시장을 붕괴시킨 디지털 카메라와 mp3 플레이어도 있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고가의 첨단시스템이었지만 무료 소프트웨어가 되어 버린 내비게이션 시스템, 70조를 넘는 기업가치의 우버가 대표적인 사례다. 빅뱅 파괴는 스마트 디바이스들의 확대로 그 영역을 점차 넓혀나가고 있다. 물론 기업들도 끊임없이 도전하는 후발업체들에 대비해 영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첩한 혁신(agile innovation)을 위한 빠른 변환(rapid transformation) 능력을 보유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제는 과거 트렌드를 기반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전략을 수립하는 것에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이후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각 분야에서 글로벌 플레이어로 등장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혁신을 이야기하면서도 다른 기업들이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안전한 시장을 대상으로 기술을 개발한다. 남들이 개발하니 우리도 개발해 실력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이른바 혁신의 강박증이다. 그러나 사실 혁신의 강박증은 베스트 패스트 팔로워가 가지고 있는 가장 커다란 스트레스이자 2위라도 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성공요인 중 하나다.
2014년 9월 더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는 우리나라 기업들의 현금보유량이 GDP 34% 수준인 4400억달러로 지나친 현금보유가 경제의 활력을 잃게 하는 케인즈의 '절약의 패러독스(paradox of thrift)'에 직면할 수 있음을 경고하기도 했다. 최근 우리나라 기업들이 사물인터넷, 자율주행차 등으로 사업영역을 넓히고 있지만, 이미 글로벌 정보통신 기업들은 우주선 발사체 재활용 기술 경쟁을 벌이는 등 지구를 넘어 미래 우주 선점을 위한 연구개발을 경쟁하고 있다.
최근 언론에는 우리나라 과학기술정책 추진 50주년을 주제로 많은 기사들과 회고의 글들이 등장한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연구기관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1966년 설립돼 올해 50주년이 됐고, 최초 과학기술 전담 독립부처인 과학기술처는 1967년 설치돼 본격적으로 현대적인 연구개발 추진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필자가 관련 기사들을 보면서 발견한 점은 어느 기사건 우리나라 기업들의 이름이 반드시 포함돼 있었고 정부, 연구소와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었다는 것이다.
국가와 시대를 막론하고 혁신의 주체는 기업이다. 현재 많은 과학기술 관련 기관에서 앞으로의 과학기술 50년을 고민하고 있다. 지난 50년과 같이 기업들도 정부 및 공공주체와 함께 빅블러, 빅뱅파괴 시대에 대비하는 정책 마련에 보다 관심을 갖고 함께 해야 대한민국과 기업들이 보다 행복하지 않을까 싶다.
차두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연구위원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