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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무라카미 하루키씨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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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무라카미 하루키씨 미안합니다 허진석 문화스포츠레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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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9월25일. 시드니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나는 취재기자였다. 전날 밤에 마신 포스터 맥주 탓이었을까. 화장실에 자주 갔다. 그러나 오전 기사를 마감하는 동안은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송고를 마치고 서울에 전화를 걸어 확인한 다음에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취재부스에서 화장실까지 거리는 30~40m. 동쪽 복도를 걸어 현관을 나선 다음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곳에 가건물이 있었다. 나는 급했다. 그러나 남자의 '볼일'은 급할수록 빨리 걷거나 달릴 수 없게 만든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옮겼다. 현관은 검은 도화지로 만든 어둠상자에 바늘로 콕 찍은 구멍처럼 아득하게 보였다. '도저히 못 참겠다' 싶을 때 까마득한 어둠의 터널 저 끝, 바늘구멍 속의 한 줄기 빛을 등지고 누군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걸음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그가 지나치려는 순간 나는 소리쳤다.

"무라카미 하루키씨()"


() 안에 물음표(?)를 찍어야 할지 느낌표(!)를 찍어야할지 모르겠다. 둘 다였을 것이다. 세상에 흩어진 모든 의미를 다 합친 '다급함'을, 아마 하루키도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그토록 명료하게 대답했을 리 없다. "하이!"라고. 인터뷰를 청했다. 하루키는 좋다고 했다. 내가 일하는 취재부스에서 하면 어떠냐고 묻자 "화이 놋(Why not)?"이라고 했다. 그러나 "급한 볼일이 있다. 40분 뒤에 보면 안되겠느냐"고 했다. 나도 "화이 놋"이라고 했다. 그는 프레스센터에서 책상 하나를 빌려 사용했다. 자리를 확인해야 했다. 나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그의 뒤를 뒤뚱거리며 따라가 40분 뒤에 찾아가야 할 장소를 외웠다.

하루키는 '스포츠 그래픽 넘버'란 잡지의 청탁을 받고 시드니에 갔다. 그는 23일 동안 올림픽을 취재하며 매일 400자 원고지 30장씩 글을 썼다. 이때 쓴 글을 묶어 2008년에 '승리보다 소중한 것'을 냈다. 여기에 원고지 100장 정도 원고를 더해 묶은 책이 지난해 12월에 나온 '시드니!'다. 하루키는 책에 인터뷰를 한 사실도 적었다. '프레스센터 책상에서 일하고 있는데, 한국의 젊은 신문기자가 "무라카미 씨 아니세요?"하고 말을 걸었다. 인터뷰를 해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3시 반까지 마침 시간이 비어서 30분 정도라면 괜찮다고 대답했다. 1시 반부터 2시까지 인터뷰를 했다. 어떻게 올림픽에 오게 됐는가, 같은 질문을 했다. 영어로 질문을 받고 영어로 대답했다.'


하루키는 30분이 아니라 한 시간 가까이 인터뷰를 했다. 그는 영어를 막힘없이 사용해서 생각을 드러냈다. "올림픽 개막식이 너무 지루해 덴마크가 입장할 때쯤 경기장을 박차고 나와버렸다. 그리고 숙소 앞 생맥주 카페에 들러 맥주를 마시고 취해버렸다. 그러나 남북한이 공동입장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기다렸을 것"이라며 '원더풀'을 연발했다. 이런 말도 했다. "스포츠는 스포츠 자체로 즐기면 된다. 왜 애국심을 들먹이나. 선수들이 메달을 딸 때도 국기 게양식 같은 것은 없애버리는 것이 낫다."


하루키가 나와 똑같이 기억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쉬울 것은 없다. 두 사람의 기억이 데칼코마니와 같다면 또한 이상한 일이다. 다만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오랫동안 간직해온 빚이 있음을 기억해냈다. 채권은 하루키와 내 기사를 읽은 독자와 나의 양심에 속해 있다. 나의 인터뷰 기사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는 "경기장 출입이 가능한 ID카드 받기가 너무 어려웠다. 세상에 하루키가 필요하다는데 ID카드를 안주겠다고 하더라"며 약간의 오만이 깃들인 너털웃음을 시작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하루키는 내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나도 이렇게 쓰지 않았다.


하루키는 웃으며 말했다. "취재를 하려면 경기장 출입이 가능한 ID카드가 필요했다. 그래서 '저 무라카미 하루키인데요, 경기장 출입이 가능한 ID를 받을 수 있을까요?'하고 사정을 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아, 그것 참 곤란했다." 내 글을 누가 고쳤을지 짐작은 한다. 그러나 누군가 내 글을 고쳤다고 해서 남의 글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하루키와 내 글의 독자에게 사과해야 할 사람은 세상에 오직 나뿐이다. 사과한다. "하루키씨, 정말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


이 글은 15년하고도 3개월 뒤에 쓰는 정정기사이다.






허진석 문화스포츠레저부장 huhbal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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