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한눈에 보는 정부 2015' 보고서가 화제다. 이에 따르면 한국은 OECD 41개국 중 국가신뢰도가 26위로 중하위권에 속한다고 한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1위인 스위스가 75%인 반면 한국은 34%이고 최하위라는 슬로베니아가 18%, 즉 한국에서는 세 명 중 한 명이 국가를 믿고 슬로베니아는 다섯 명 중 한 명이 국가를 믿는다는 것이니 순위를 기준으로 할 일이 아니다. 공화국으로 출범하여 얼마나 단단한 국가체제를 만들었는가 하는 점에서 국가신뢰도는 중요하다.
국가에 대한 불신은 대의민주주의가 고장났다는 신호다. 국민이 뽑은 대표가 딴 생각이 있어 국민의 뜻을 살피지 않고 국민의 이익을 위해 국가기능을 통제하지 않는다는 데에 국민의 의혹이 있는 것이다. 국민과 국가 사이에 마(魔)가 끼어 있으면 대의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다. 그 전형적인 예가 그리스 사태로 유명해진 올리가르히(oligarchy)이다. oligarchy라는 단어는 oligio(몇몇의)와 arche(지배체제)의 합성어로 흔히 국가학에서 말하는 과두체제(aristocracy)의 타락한 형태를 말한다.
그리스가 지금과 같이 믿을만한 나라를 갖기 어려운 사회구조에는 당연히 그 역사적 배경이 있다. 15세기부터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하에 있다가 19세기 유럽열강의 도움으로 400년 만에 독립을 했으나 그리스인들의 뜻과는 다르게 유럽열강은 바이에른 왕국 출신의 왕을 세웠다. 그 이후 양차대전을 혹독하게 치르고 터키와의 전쟁과 내전을 겪으면서 왕정과 공화정을 오간 끝에 197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공화국이라 할 수 있는 체제가 들어선 것이다. 500년이 넘는 동안 권력자는 국민들을 수탈하기만 했고 국민들은 가진 것을 국가에 들키지 않으려고 숨기기에 급급했다. 수완 좋은 사업가들은 이렇게 국가와 국민의 결속이 단단하지 않은 틈을 노린다. 국유재산 불하와 민영화는 더 없는 기회다. 올리가르히(oligarchy)는 이렇게 탄생한다.
지금의 그리스 사태의 원인으로 무리하게 유로존에 가입하기 위해 그리스 정부가 골드만삭스와 맺었던 파생상품 계약을 든다. 이 계약으로 인한 국가채무가 2008년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가 터지자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럽연합 가입으로 직접적인 이익을 얻는 몇몇 세력에 휘둘리지 않고 그 가입과정을 투명하게 했다면 그래서 좀 더 질질 끌었다면 전략적으로 그리고 문화적 정통성의 면에서 아쉬운 쪽은 유럽연합이므로 협상을 유리하게 전개할 수 있었을 것 아닌가. 그리고 국가채무 역시 올리가르히를 둘러싼 고질적인 부정부패와 막대한 탈세가 아니었다면 고통스럽긴 하겠지만 예산 삭감과 세금 인상을 통해 메울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러한 올리가르히를 한국의 재벌과 동치(同値)시키려는 주장들이 있지만 이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정경유착을 통해 정책이 결정될 것이라는 의심과 민영화에 대한 불안은 유사하지만 그 기업들에 내재한 생산성과 경쟁력의 측면에서 그리고 사회적인 견제가능성에서는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역사적 굴곡이 많았고 국가신뢰도 19%인 그리스와는 분명 다른 상황이다.
하지만 예컨대 최근 드러난 롯데그룹의 복마전과 같은 운영에 대한 대응은 심각한 분기점이 될 것이다. 정치권이 이러한 재벌의 행태를 통제하지 않는다면, 좀 더 정확히는 사회적 압박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그러한 분위기가 만연해질 것이다. 신뢰는 통제에서 나온다. 통제하지 않으면 국가에 대한 신뢰는 떨어지고 국민과의 결속은 느슨해질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그리스보다 더욱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스는 문화적 유산으로도 지정학적으로도 유리한 위치에 있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은 우리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주변의 열강들과의 관계를 보면 광복 70주년의 감격은커녕 등골이 서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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