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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앓는 여자, 김혜주

시계아이콘02분 31초 소요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프라자에서 20일부터 전시, '파라다이스를 훔치다'

[이명재 논설위원] 예술이 어떤 위안을 주고자 하는 것이라면, 빛을 통해서건 그늘을 통해서건 결국 이 고통스런 삶을 살아내느라 지치고 고단한 인간들에게 어떤 위안을 주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러자면 작가는 자신이 먼저 그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다. 모든 진정한 예술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고통을 먼저 보고, 먼저 아파하는 것이다.


 고통을 먼저 보고 느끼는 것, 그것은 작가의 고통이자 특권이다. 고통이지만 '황홀한 고통'이기에 그것은 특권이다. 작가의 작업은 그 고통 속에서 새로운 희망, 낙원의 꿈을 길어올리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찾아 들어간 지옥에서,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하는(신곡)' 그 곳에서 낙원을 찾는 이, 그가 곧 작가일 것이다.
 작가 김혜주는 그 작가의 숙명에 저항하려 했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신의 소리를 들어버렸으며 그런 이상 그 소리를 외면할 수는 없다는 걸 이제는 받아들인다. 세상에 대한 한 없는 연민이 자아내는 눈물을 물감의 안료로 삼으며, 고통을 치러낸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감사와 평온을 자신의 붓으로 삼는 이 화가는 이제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더 깊이 들여다보는 삶의 비극성이 주는 고통을 온전히 제 몫으로 한다. 그리고 그에 맞선다. 그의 작업은 진혼무를 추기 위한 전쟁이며 그녀 자신은 그 전쟁의 전사다. 그의 예술은 굿이며, 그는 무당이다.

 그러나 그 작업은 너무도 힘겨운 것이다.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것은 자신의 신체 일부를 내주는 것이다. 작품 한 점을 그릴 때마다 그는 어김없이 끔찍한 신열을 앓아야 하며 온몸의 기진맥진을 치러야 한다.
 그의 개인전 제목이 '파라다이스를 훔치다'가 된 것은 낙원이란 그녀가 앓는 것과 같은 고통 없이는, 슬픔 없이는, 연민 없이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일까.


 낙원을 그린 것이기에 그의 작품들은 환상적이며 몽환적인 것일까. '블루'연작은 슬픔의 바다와 그 속에 떠 있는 노란 배를 담았다, 고 작가는 말한다. '낙타-별과 달을 품다'에서 사막의 뜨거운 낮과 차가운 밤을 횡단해야 하는 낙타의 운명은 우리네 인생을 나타낸다. 그 어떤 상황에 처했을지라도 낙타는 별과 달을 품었기에 묵묵히 사막을 가로지른다는 것을 얘기한다.
 악어와 오리가 등장하며 낙타와 기린이 날고, 여인도 날아가는 그의 그림에 대해 누구나 환상적이라고 할 것이다. 맞다. 그러나 그 환상에는 어느 현실보다 분명한 현실이 있다. 어떤 실제보다 더 극사실의 진실이 있다. 현실 너머의 진실이 있다.

 '월경 연대기' 연작은 여성의 달거리를 상징하는 붉은 색으로 생명의 힘과 고통의 피흘림을 표현했다. "월경, 혐오스러운가요? 당신이 사랑하고 설레는 그 여인도 매달 월경, 빨간 피를 봅니다. 우리 인류의 역사는 피흘림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피흘림과.... 누구도 의도치 않은 자연스레 흘리는 여성의 피흘림. 그것이 인류의 생명을 잉태하게 하지요. 우리는 늘 그늘에 숨겨진 그것을 간과하지요. 그 피, 난 그 피로 인류가 꽃을 피워왔다고 믿습니다. 그 피가 과연 혐오스런 걸까요?"


 작가는 애초에 전시회의 제목을 '의지적 사파리'로 붙이려 했다.
 "의지적이란 어휘를 쓴 이유는, 내 그림은 현실과 상관 없이 넘 동떨어져 꿈을 꾸는 그림이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일찍 죽는 게 목표였다는 이 작가는 이제 달라졌다고 말한다. "최선을 다해,더 좋은 작품을 내는 게 목표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울 딸이 취해서 말하길, 아직 엄마는 더 좋은 작품 대작이 나올 거라고 믿는단다. 엄마는 너무 아이 같단다."
 우리도 그렇게 믿는다. 이미 충분히 훌륭한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여전히 아이인 그는 앞으로 매일 매 순간 더 좋은 그림을 그릴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이 화가를 만나러 가 보자. 이 생명의 계절 5월에, 그러나 또한 슬픔과 눈물의 계절이 돼버린 5월에 이 눈물의 화가를, 어떤 엄마보다 더 엄마인 이 어머니를,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영원히 소녀일 이 여인을, 이 가녀리면서 강철 같은 작가를, 새벽에 홀로 일어나 세상의 온갖 연약한 존재들이 내는 울음소리를 듣고 오열하는 순정한 영혼을, 그 울음에서 삶의 비의(秘意)를 보는 무당을, 자신의 삶이야말로 가장 치열한 화폭인 김혜주를 만나러 가보자.


 김혜주는 말한다. "하는 데까지, 다만 내 일이란 생각으로 하는 것일 뿐"이라고. 그러나 그녀를 지지하는 이들-그녀의 팬이 아니라 '지지자'라고 해야겠다-은 그의 그림을 기필코 보러 갈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작품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에 작가에게 감사해 할 것이다. 그러면서 미안해할 것이다. 감사하면서 미안해 할 것이다. 작가가 웃으며 말할 때도 그 웃음 뒤에 그의 몸의 깊은 곳에 울음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울음을 보기 위해 그에게 가야 할 듯하다. 아니 함께 울기 위해 가야 하겠다. 그래서 통곡의 응결인 그의 그림 앞에서 잠시라도 울어야겠다. 그 눈물이 우리를, 이 범속하고 비루한 일상에서 단 한 순간이라도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다. 그때 낙원의 한 풍경이 섬광처럼 비칠 것이다.
 20일부터 26일까지. 서울 인사아트플라자 갤러리.
 이명재 논설위원 pro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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