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과학기술계가 위기다. 과학기술 투자의 성과가 부실하다는 논란이 거세며, 이 논란은 과학기술 연구기관과 사업에 대한 구조조정 이슈로 확장된다. 그 과정에서 독일의 프라운호퍼 모델이 구조 개혁의 압도적 준거로 인용된다.
프라운호퍼 모델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것의 재정 수입 구조 때문이다. 프라운호퍼 연구 재원은 기본 자금, 그랜트 자금, 산업계 자금으로 구성되며 각각 35%, 30%, 35%를 차지한다. 이 중 산업계 재원이 35%라는 사실이 재정 수입의 대부분을 정부에 의존하는 국내 연구개발 기관과 대비되는 점으로 부각된다.
하지만 이러한 벤치마킹 스토리에는 함정이 있다. 독일에는 프라운호퍼 모델만 있는 게 아니며, 독일의 연구시스템은 주정부 중심 발전 과정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독일에는 4대 연구협회가 있다. 기초연구를 표방하는 막스플랑크, 실용주의 지향의 프라운호퍼, 공공성을 추구하는 헬름홀츠, 그리고 인문사회와 기초과학 중심의 라이프니츠 연구협회다.
프라운호퍼를 제외한 세 개의 연구협회는 재정 수입의 70~80%를 정부로부터 받는다. 그 외의 금액은 대부분 공공자금 기반의 계약연구로 채워지며 민간 자금은 대개 5% 이하다. 또한 독일의 공공 연구시스템은 주정부 단위로 발전해 왔다. 이는 연구개발 정책의 공간적 우선순위가 지역, 국가, 글로벌 순서로 매겨짐을 뜻한다. 예를 들어 프라운호퍼 연구협회에 속한 60여 연구소는 지리적으로 독일 각 지역에 위치하면서 지역 대학 및 산업과의 협력관계를 중시한다. 지역 분산형 발전이 이루어지다보니 연구소나 대학의 특성이 드러나고 연구 분업의 지도가 그려진다. 국가 전체적으로 보자면 독일의 연구시스템은 막스플랑크 등 3개의 공공 연구협회가 기초연구를, 프라운호퍼 연구협회와 대학이 응용연구를, 기업이 개발연구를 맡는 식으로 구분된다.
우리나라는 중앙정부 주도적 발전을 추구해 왔고 그 경로 안에서 연구시스템이 만들어졌다. 경제개발 초기 정부는 출연연구소를 만들어 산업계의 기술개발을 돕게 했다.
산업계가 성장하자 정부는 한편으로 출연연구소가 응용 또는 기초연구로 이행하도록 유도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성장 동력이 될 제품 개발연구를 독려했다.
그 결과 연구 주체의 지리적 분산과 연구 분업화보다는 대전이라는 특정 지역에의 집중과 종합연구 방식이 정착되었다. 연구기관 대부분이 비중만 다를 뿐, 개발, 응용, 기초연구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는 것이다.
이렇듯 연구 주체들이 정부 정책과 사업의 영향하에 발전하는 양상은 최근까지 이어졌다. 예컨대 최근 10년간 과학기술 정책에서는 세계적 수준에의 도달을 강조했다. 이는 연구소와 대학이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글로벌 수준 도달의 성과를 내야 함을 의미했고, 실제 연구 주체들은 국제 학술지 논문과 특허의 양적 증가를 그 성과로서 보여줬다. 연구 주체가 개성과 특색을 가지고 발전하기보다는 중앙 정부의 정책과 사업에 부응하는 형태로 발전해 온 것이다.
지금의 과학기술 성과 논란은 정부 주도적 연구시스템 발전의 한계를 드러낸다. 이 논란은 '성과'에 대한 당초의 정책 정의(글로벌 수준)와 현재 일부 정책 그룹이 추구하는 정의(산업적 유용성)가 달라서 발생한다. 이를 정책 문제로 설정하고 해결책을 추구하는 방식도 위험성을 내포한다.
프라운호퍼 모델과 같은 특정 사례로 비틀어진 단일 답안을 만들고 이를 연구시스템에 적용하려 한다면 말이다. 따라서 지금의 논란이 건설적인 방향으로 전개되기 위해 우리는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만들어 온 시스템과 게임의 규칙이 미래에도 유효한가를 묻는 일이다.
홍성주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