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스(+)는 이익, 마이너스(-)는 손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공감대가 잠시 헐거워진 것은 며칠 전 사무실에서다. 연말정산이 사단이었다. 조국 발전을 궁구하는 듯한 엄숙한 표정으로 자판을 두드리던 후배가 한숨을 내쉬며 마이너스면 토해내는 건가, 혼잣말을 남기는 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훈수가 꼬리를 물었다. 플러스가 토해내는 거야, '환급'이니까 플러스는 돌려받는 거지, 어쩌니 저쩌니 한참 시끄럽다가 '내가 총무부에 물어보니'로 시작된 누군가의 일장연설로 소동은 일순 정리됐다(마이너스가 돌려받는다). 그 순간 문득 불온한 생각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이 조국은 왜 자꾸 서민들의 밥그릇에 손을 대는가.
먹고사는 게 팍팍한 서민들에게 더없이 현실적이면서 생존적인 '밥그릇'은 영화 <허삼관>의 원작이자 중국의 대표작가 위화의 장편소설 <허삼관 매혈기>에도 등장한다. 가진 게 없으니 제 몸의 피를 팔아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는 허삼관의 고단한 삶을 익살과 해학으로 그려내는 이야기 초반부에 좋은 신랑감을 구하는 방법이 소개되는데, 여자 집에서 남자를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다. 남자가 밥을 몇 그릇 먹는냐는 피를 얼마나 팔 수 있느냐와 비례하는 만큼 남자가 비운 밥그릇 숫자로 가장으로서의 능력을 판단하는 것이다. 신경숙의 짧은 소설 <겨울나기>에서는 배곯는 들고양이가 안쓰러워 누군가 마당에 접시를 놓고 사료를 챙겨주는데 나중에 이 밥그릇을 놓고 까치떼들의 혈전이 살벌하게 펼쳐진다.
먹고사는 생존적 차원에서 밥그릇만큼 사실 무서운 것은 없다. '그 놈의 밥그릇'을 지키려고 직장인들은 새벽부터 일터로 향하고, 상사의 짜증과 질타를 묵묵히 견디고, 거래처에 부서져라 허리를 굽히고, 저녁 회식 때마다 이마에 맨 넥타이를 휘날리고, 숙취로 아우성인 위장에 찬물 한잔 겨우 적선하는 것이다. 내 가족, 우리 조직을 위해 허삼관처럼 피만 빼주는 게 아니라 영혼도 기꺼이 내주고 까치떼처럼 악악거리며 싸우기도 한다. 그렇게 지킨 밥그릇이다.
조세정의, 복지증대, 납세의무 다 좋은데 허구한 날 왜 우리냐고 직장인들은 성토한다. 토마 피케티 교수가 '21세기 자본'에서 주장하는 바, 부자들의 자본소득은 애써 외면하면서 직장인들의 유리지갑 속 근로소득은 귀신같이 잘도 빼먹는 정부가 야속하고 원망스럽다. '13월의 월급'이 '13월의 폭탄'이 된 지금 여론은 부글부글 끓는다. 위정자들도 밥그릇을 빼앗겨봐야 한다면서. 선거 때 두고보자면서.
이정일 산업2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