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대기업 기업가정신
[아시아경제 김은별 기자] "어떤 기업가를 존경하시나요?"
존경하는 한국의 기업가를 묻는 질문을 받으면 어떤 대답을 할까.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삼성, LG, 현대 등 내로라하는 국내 대기업의 창업가들을 꼽는다.
삼성그룹 창업자인 호암 이병철 회장, 현대그룹을 창업한 아산 정주영 회장, LG그룹 창업자인 연암 구인회 회장, SK그룹의 최종현 회장 등이 대표적이다. 어렵던 시절 '할 수 있다'는 정신 하나만으로 신화를 이뤄낸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이뤄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대한민국의 기업들이 신화를 회상하며 살 수는 없다. 중국이 빠르게 치고 나오고 있고, 한국 기업들의 위상은 이미 세계 수준인 상황에서 '이 정도면 됐다'는 생각으로는 살아남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대한민국은 어떤 기업가들이 난관을 헤쳐나갔고, 앞으로의 한국 경제를 이끌 기업가들에게 요구되는 정신은 어떤 것들일까.
◇세계 최빈국에서 10위권 경제대국으로= 1950~1960년대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던 대한민국. 우리나라가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수많은 기업가들이 있었다. 특히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신화를 창조한 창업 기업가들이 대표적이다.
창업 기업가들은 국내에 없던 기업을 일구고, 인재를 키워내는 데 일생을 바쳤다. 이 같은 경제 영웅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삼성이 현재 전자업계 글로벌 1위로 이름을 떨치는 것은 과거 모두들 어렵다고 한 반도체 산업에 뛰어든 이병철 회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진입장벽이 높은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겠다는 결단을 내리고, 아들인 이건희 회장이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 인수를 추진하면서 한국 최대 효자산업의 싹을 틔울 수 있었다. '전자산업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는 반도체 산업이 든든하게 뒷받침됐기에 스마트폰, TV, 생활가전 등 다양한 분야에서 브랜드가치를 높일 수 있게 됐다.
세계 1위 조선강국으로 거듭나는 데 공로를 세운 정주영 회장도 마찬가지다. 황량한 울산의 바닷가에 조선소를 짓겠다며, 돈을 빌리러 영국으로 건너간 정주영 회장의 호기가 없었다면 세계 1위 조선강국은 감히 꿈도 꾸기 힘들었을 것이다.
임직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파 라디오를 시작으로 전자 산업에 진출했던 구인회 회장, 전쟁의 잿더미에서 건져 낸 직물기 20대로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 계열화를 일궈낸 최종현 회장 등 재계 창업주들의 기업가 정신은 현재 젊은 세대들에게도 귀감이 되는 정신이다.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격호 총괄회장은 국내 유통산업의 성장사를 쓴 인물로, 주력 그룹 중 생존해 있는 유일한 창업주다. 스무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우유배달 등을 하며 고학으로 와세다고등공업학교(현 와세다대 이학부)에서 학업을 마쳤다. 일본에서 투자를 받아 처음으로 세운 공장이 미국의 공습으로 불에 타버렸고 빚더미에 앉는 등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후 비누와 포마드 사업이 성공해 빚을 모두 갚았다.
이어 롯데제과를 설립하고 껌 사업을 시작하면서 성공가도를 달렸다. 일본에서의 성공을 발판 삼아 신 총괄회장은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해 모국에서의 사업을 시작했다. 식품사업에서 시작한 롯데는 이후 1979년에 롯데쇼핑을 설립하며 유통사업에 진출해 국내 1위의 유통기업으로 성장했다.
이처럼 껌 사업으로 시작해 유통거인으로 성장한 롯데그룹은 현재 자산 91조7000억원에 74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5위로 성장했다.
신 총괄회장은 '거화취실(去華就實: 화려함을 멀리 하고 내실을 취한다)'를 좌우명으로 삼아 내실있는 경영으로 롯데그룹을 키워내며 한국 유통산업에 큰 획을 그었다. 그는 94세의 나이에도 매일 업무 보고를 받고 숙원사업인 제2롯데월드 공사 현장을 두 차례나 방문할 정도로 여전히 경영 일선에서 활동하고 있다.
◇'기업가 정신' 패러다임 변화= 그러나 최근 들어 과거와 같은 기업가 정신은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찾아보기 어렵다기 보다는, 과거와 같이 '무조건 한다'는 식의 기업가 정신은 환영받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국가 경제가 살아나려면 무조건 일해야 한다, 열심히 하자'는 기업가 정신에 더이상 국민들이 공감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최근 저성장, 소득격차 확대 등으로 반기업ㆍ반시장적 정서가 팽배해진 것이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면 이제는 '기업가 정신'은 필요없는 시대가 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과거와는 다른 형태의, 모두들 공감할 수 있는 기업가 정신이 필요한 상황이다. 기업가들만 '무조건 도전하자'고 외쳐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삼성그룹의 경우 새로운 형태의 기업가 정신을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선 반도체 사업장에서 일어난 직업병 문제에 대해 해결하고 가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권오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이 직접 직업병 문제와 관련해 사과한 데 이어, 최근에는 보상은 물론이고 앞으로 일어날 직업병 재발방지 대책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역시 평소 반도체 직업병 문제에 대해 보고받으며 어떻게 진전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는 무조건 반도체 사업장에서 일하는 인력들에게도 '열심히 하자', '하면 된다' 식의 생각을 요구했다면,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함께 회사를 만들어나가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고 보면 된다.
재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오너가 지시하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문화였다면, 요즘에는 임직원들이 오너의 철학에 공감하지 못하면 일이 되지 않는다"며 "공감하는 문화, 소통하는 문화가 새로운 형태의 기업가 정신"이라고 설명했다.
글로벌 리더십을 키우려는 노력도 돋보인다. 한국 기업을 이끌 재계 3세 경영 후계자들은 글로벌 리더십에 집중하고 있다.
재계 3세들의 글로벌 경영 데뷔 무대인 스위스 다보스가 대표적이다. 다보스 포럼은 거물급 경제계 인사를 만나고 국제비즈니스 무대에 데뷔하는 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이 부회장을 비롯해 정의선 현대기아차그룹 부회장과 조현상 효성그룹 부사장, 허세홍 GS칼텍스 부사장, 한화쏠라의 김동관 상무 등이 다보스포럼을 통해 국제무대에 얼굴을 알려온 대표적 3세 경영인이다. 정 부회장은 2006년부터 다보스포럼에 참석하면서 국제무대에 꾸준하게 얼굴을 알려왔고 2009년에는 다보스포럼이 선정한 '차세대 글로벌 리더'에 선정되기도 했다.
2011년부터 롯데그룹 회장을 맡은 신동빈 회장은 국내 1위 유통업체에 머무르지 않고 해외 영토 확장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도 내년에는 보폭을 해외로 한층 넓힐 것으로 예상된다.
재계에서는 과거 창업주와 2세대 경영자들이 기업을 키우고 정착시키는 데 주력했다면, 3세 경영자들은 임직원과의 공감대, 글로벌 시장에서 기업 알리기 등에 주력할 것으로 보고 있다. 3세 경영자 스스로도 비서실 동행을 자제하고 자유롭게 업무파악을 위해 출장을 떠나며 친근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우리나라에서는 '기업가'라고 하면 왠지 무거운 이미지, 강인한 이미지라는 인식이 있었다"며 "앞으로는 한국에서도 애플의 스티브잡스와 같은 창의적인 기업가들이 존경받는 시대가 오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은별 기자 silversta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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