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임혜선 기자]천재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을 조명한 영화가 상영 중이다. 21세의 나이에 파리 크리스찬 디올의 '오트 쿠튀르 하우스'(고급 맞춤 의상점)수석 디자이너로, 혜성과 같이 등장한 이브 생 로랑의 삶을 잔잔하게 그려내는 영화다.
고급 맞춤복으로 시작했나 그는 첫 컬렉션부터 귀부인을 위한 화려한 드레스 대신 캐주얼한 옷을 들고 나온다. 파격적인 시도였다. 프랑스인들은 오트 쿠튀르의 황태자라고 했지만, 그는 대중과 사회의 흐름을 읽고 그에 맞는 새로운 패션을 제시한 혁명가이기도 했다.
그는 특히 아프리카나, 러시아, 중국, 페루, 터키 등의 전통 의상에서 영감을 얻었다. 아프리카계 이만(Iman), 아시아계 티나 초우(Tina Chow) 등의 모델을 기용하기도 했고, 오트 쿠튀르 무대에 흑인 모델을 최초로 세우는 등, 패션계에 이국 취향 바람을 일으켰다.
이브 생 로랑은 1966년 남성용 턱시도에서 영감을 얻은 스모킹 슈트(Smoking Suit)를 선보인다. 이는 여성 정장에 처음으로 바지 정장을 도입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턱시도는 19세기 신사들이 여성의 출입이 금지된 흡연실에서 즐겨 입는 이브닝 웨어였다. 여성에게 바지 착용이 금기시 되었던 사회 분위기에서의 여성을 위한 새로운 이브닝 룩으로, 성의 혁명(the Sexual Revolution)시대에 꼭 맞는 파격적인 의상이었다. 이는 여성들이 밤낮으로 바지를 입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남녀평등의 목소리를 대변한 패션으로서 의의가 크다. 우리나라도 여기에 힘입어 1970년대부터 바지가 여성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1967년, 페미니스트들이 브래지어처럼 여성을 억압하는 속옷을 태워 버리자고 주장하며 여권 신장의 목소리를 높일 무렵, 이브 생 로랑은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채로 가슴이 다 비쳐 보이는 혁명적인 시스루 룩(see-through look)을 내놓는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를 여성 해방의 상징이라 환호했다. 당시 파격적이었던 시스루 룩은 훗날 디자인의 중요한 모티프가 되었고, 2010년을 전후해서는 연예인 뿐 아니라 일반인 사이에서도 유행하여 일상적으로 착용하는 옷에까지 영역을 넓혀갔다.
그는 다른 예술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거장들의 작품들을 아름다운 의상으로 탈바꿈시켰다. 화가 몬드리안(Mondrian)의 빨강, 파랑, 노랑으로 구성된 회화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드레스나, 앤디 워홀(Andy Warhol)의 팝아트(Pop Art), 반 고흐의 해바라기에 이르기까지를 다양하게 의상에 활용하였다. 때문에 그는 20세기 패션 디자이너 중 가장 탁월한 색채 감각을 가졌다고 평가 받는다. 시대를 읽는 눈과 놀라운 창조력으로 생전에도, 사후에도 전설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패션 역사의 전설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 같은 업적 뒤에는 평생 우울증, 약물, 알코올 중독 등 무질서한 생활이 있었다. 어쩌면 그의 패션 감각은 천부적인 것이었고, 천재를 감당하기에는 무질서 해질 수밖에 없는 고뇌가 뒤따라야 했는지도 모른다. 영화 '이브 생 로랑'은 20세기 후반을 디자인한 불멸의 작품들을 만난 감격과 더불어 그의 삶을 통해서 배워서는 안 될 것들까지 말해주고 있다. 패션계는 그의 '이후'를 고민해야 한다.
송명견 동덕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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