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임혜선 기자] 슬픔 가운데서도 선거는 치러졌고, 누구도 크게 기뻐 할 수 없는 시점에서 당선의 벅찬 드라마도 여기저기 펼쳐졌다. 한꺼번에 7명을 선택해야 했다. 지역의 의원까지 얼굴도 모르는채 민심이라고 찍어댔다. 그리고 희비가 엇갈리는 결과도 만들어냈다.
세상이 바뀌고 관직도 바뀌며 복잡해졌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국민들이 공직에 나선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바람'일 것이다. 올바르게, 그리고 민초들을 위해 일해주길 바라는 그 '바람' 말이다.
유사 이래로 관직에 오르면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했다. 눈에 띄는 복장으로 차별화하기도 했다. 관(冠)의 장식, 옷의 색, 옷을 묶는 대나 목에 닿는 깃의 색 등으로 그 직급을 나타내기도 했다. 기록에 나타나는 최초의 복색 제도는 백제 고이왕 27년(260년) 때였다. 직급에 때라 관(冠)에 금화나 은화 장식을 하였고, 허리에 묶는 여섯 가지 색(자紫,조早,적赤,청靑,황黃,백白)의 대(帶)로 계급을 나타냈다. 또한 관리는 비의(緋衣:붉은 상의)를 입되 일반인은 금했다. 뒤 이은 신라나 고려복색제도에서도 대체적으로 고위직들이 입는 옷은 붉은색 계통이었다.
조선 왕조에서는 의복제도가 더욱 세분화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복(朝服:경축일, 설날 등에 입음)은 적색(赤色), 공복(公服:공무시, 또는 외국 사신을 맞을 때)은 홍(紅:정3품 당상관), 청(靑:종3품-6품), 록(綠:7-9품)의 3색이었다. 상복(常服:평상 집무시) 역시 정3품까지만 홍색(紅色)이었다. 이 제도가 조선 500년 동안 그대로 계속된 것은 아니나 조선왕조 말에 이르러 흑색(黑色)으로 바뀌기까지 최상위 관리의 옷 색은 눈에 확연히 띄는 붉은색 계통이었다.
자료에 따르면, 오늘날의 행정 직책과 조선시대의 직급을 비교할 때, 국무총리는 정1품(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다. 각부장관(6조판서)과 서울시장(한성판윤)은 정2품이고, 도지사(관찰사)와 광역시장은 종2품에 해당된다. 정3품은 일반시의 시장(목사: 관찰사 밑에서 고을을 다스리는 벼슬아치) 등 기초 단체장 정도로 비교되고 있다. 말하자면 이번 선거에서 우리는 광역의원과 기초의원을 제외하면, 정3품 이상으로 홍색 옷을 입을 수 있는 높은 벼슬아치들을 뽑은 셈이다.
품계를 나타내는 데에는 옷의 색 외에도, 관(冠)장식, 대에 사용된 재료, 무늬, 흉배 등 여러 가지 부속품들도 있었다. 그러나 멀리서도 확실하게 직급을 나타내는 옷의 색과는 비교가 안되는 것이었다.
붉은 색을 입은 관리는 그 직책이 높아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관리는 백성들 위에 군림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까.
다산(茶山) 정약용은 '원목'과 '탕론'이라는 논문에서, 요약컨대 목(牧:통치자)은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이장(里長)에서 천자까지 백성들이 밀어주지 않으면 될 수 없는 벼슬이다. 따라서 천자가 대중의 의사와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할 경우에는 그를 추대한 백성이 끌어내릴 수도 있음을 당연한 것으로 본다는 이론을 일찍이 편바 있다.
모름지기 고위직을 받은 선출자들이 옛날처럼 눈에 확 띄는 붉은 옷을 입지는 않을지라도,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확연히 들여다보이는 오늘날, 정3품 이상의 벼슬에 올랐다고 자만하지 말고 진정 백성을 위해 노력 해주었으면 한다. 그건 의무다.
송명견 동덕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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