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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의 한 수', 그리고 살수와 이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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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만에 악역으로 돌아온 이범수 인터뷰 "한 컷 한 컷 고민하지 않은 장면이 없다"

영화 '신의 한 수', 그리고 살수와 이범수 '신의 한 수'에서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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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바둑을 처음에는 신선놀음이라고 생각했다. 점잖게 앉아서 바둑알만 내려놓으면 되니까.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 한 수는 상대방의 급소를 찔러 죽이겠다고 칼을 휘두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우아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전쟁을 펼치고 있는 것이 '바둑'이다."

영화 '신의 한 수'는 내기바둑을 소재로 한 액션영화다. 정적인 '바둑'과 동적인 '액션'의 조합에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지만 배우 이범수(44)는 오히려 그런 점에 흥미를 느꼈다. "도대체 바둑을 어떻게 액션과 어우러지게 할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나리오를 읽어 나갔다. 그리고 그가 맡게 될 인물 '살수'가 눈에 들어왔다. 영화 '짝패' 이후 9년 만의 악역을 맡은 그를 최근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착수(着手·바둑판에 돌을 놓다)

한 때 프로 바둑기사였던 '태석'은 '살수'가 짜놓은 내기바둑판에서 형을 잃는다. 형을 죽인 누명까지 뒤집어쓴 '태석'이 바둑을 이용해 복수에 나서는 게 영화의 큰 줄거리다. 이범수를 비롯해 정우성, 안성기, 이시영, 김인권, 안길강, 최진혁 등의 배우들이 바둑판의 최고 고수로 등장한다. 문제는 바둑이 단시간에 배울 수 있는 종목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범수는 일단 바둑알과 친해지는 것부터 시작했다.


"바둑을 배우려고 해도, 사람들이 알려줄 길이 없다고 하더라. 바둑은 학습하는 게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라면서 말이다. 일단 바둑알을 손에 익숙하게 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어딜 가나 계속 만지작거리면서 다녔다. 또 내가 맡은 역할이 '절대악'인 캐릭터이기 때문에, 바둑알을 내려놓는 손이 부드럽고 우아할수록 더 이질적으로 느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들과 달리 중지와 약지를 이용해서 바둑알을 잡고, 거울을 보면서 연습했다."


영화 '신의 한 수', 그리고 살수와 이범수 이범수


포석(布石·전투를 위해 진을 치다)


악역을 보다 악역답게 보이기 위한 궁리도 했다. "조폭 영화의 예상가능한 두목을 하고 싶지 않았서"이기도 했고, "예전 '짝패'에서 보여줬던 악역을 뛰어넘어야겠다는 욕심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시나리오에 나와 있지 않아도 인물의 이미지를 직접 그려보았다. 영화 속에서 '살수'는 늘 양복을 차려입고, 머리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 넘겨 빗은 채 등장한다. 하지만 사우나 장면에서 언뜻 비춰주듯, 온 몸에는 험악한 문신이 가득하다. "세련되고, 깔끔한 모습에서 나오는 송곳 같은 차가움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양복입고 사업한다고 해도 건달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 이질감을 문신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굳이 액션영화에서 무테 안경을 쓰기로 설정한 이유도 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안경을 쓴 채 타석에 들어가는 친구가 있었다. '저렇게 빠른 공을 안경을 쓰고 치단 말인가?' 상당한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이 인물 역시 그런 차원에서 안경을 쓴 것이다. 안경 쓴 얼굴로 맞으면 자신만 손해인데도, 충분히 빠른 액션을 소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현한 거다. 하지만 가장 마지막 액션 장면에서 태석(정우성)과 겨룰 때, 드디어 안경을 벗는다."


사활(死活·삶과 죽음의 갈림길)


최근에는 영화보다는 드라마에서 자주 얼굴을 내비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도 있었다. "드라마에서는 악역이 아닌 이상, 연기력을 십분 보여줄 만한 공간이 넓지 않기" 때문이다. 좀 더 자극적인 역할을 맡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신의 한 수' 캐스팅이 들어왔다. "사람을 죽여 놓고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거침없고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인물"에 매력을 느꼈다.


"극단적인 캐릭터이다 보니까 에너지 소모도 많았다. 촬영하면서 가장 스트레스 받았던 부분은 '내가 정말 악당 같아 보일까?'하는 지점들이었다. 악역이 악역처럼 보이지 않으면 연기를 하는 의미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또 내가 등장했을 때 관객들에게 긴장감을 줘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한 컷 한 컷 고민하지 않은 컷이 없다."


신의 한 수


흔히들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바둑판을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패착(敗着·지게 되는 나쁜 수), 행마(行馬·조화를 이루어 세력을 펴다), 곤마(困馬·적에게 쫓겨 위태로운 돌), 계가(計家·바둑을 다 두고 승패를 가리다) 등 바둑 용어들은 인생의 중요한 순간순간에 대입해볼 수도 있다. 가로세로 각각 열아홉 줄이 만들어놓은 361개의 교차점 중 어느 곳에 한 수를 놓느냐에 따라 바둑판이든 인생이든 달라진다.


"돌이켜보면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이 나의 '신의 한 수'같다. 배우가 돼서 많은 사랑도 받게 됐고, 배우이기에 누릴 수 있는 많은 기쁨이 있었다. 배우 인생에서는 드라마 '외과의사 봉달희'나 '자이언트'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이 전환점이 됐다. 영화 '신의 한 수'에서 '살수' 역할을 했던 것도 나에게는 '신의 한 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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