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선제(漢宣帝, BC 91~49)는 전한의 제9대 황제다. 어릴 때 이름은 병이로 한무제의 황태자 유거의 손자다. 유거가 무제 말기 강충의 무고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됨에 따라 일찍이 민간에서 자랐다. 당대의 실력자 곽광에게 옹립되어 황제로 즉위했다.
한선제의 즉위는 전술한 강충 무고사건을 언급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다. 무제 말년은 끊임없는 무고의 연속이었다. 일단 무고사건에 휘말리면 혹리의 혹독한 고문으로 역모죄로 몰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무제는 말년에 주술에 빠져들어 주변 사람들이 무고를 하여 저주를 퍼붓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곤 했다. 강충은 출세지상주의자로 이전에 태자 유거의 불법을 적발한 적이 있어 불편한 사이였다. 무제 사후 황태자가 뒤를 이을 경우 자신의 안위가 우려되었다. 결국 태자를 무고했다. 태자는 쿠데타를 도모하지만 싸움에서 져 교수형에 처해졌다. 황태자 일족은 주살되고 손자인 유병이는 민간에서 양육되었다.
실력자 곽광은 무제의 뒤를 이은 소제가 BC 74년 요절하자 창읍왕 유하를 옹립하지만 바로 폐위시키고 유거의 손자인 병이를 황제로 옹립했다. 소제의 사망, 창읍왕의 폐위 및 선제의 즉위까지의 권력 교체는 철저히 곽광이 주도했다. 유병이는 하급관리인 허광한의 딸과 결혼하여 외척세력이 미약했다. 곽광의 입장에서는 후사로 삼기에 딱 좋은 상대였다. 곽광은 선제에게 계수귀정(稽首歸政), 머리를 땅에 대고 정권을 반납하겠다고 주청했다. 교묘한 정치적 제스처였다. 선제는 이를 사양하고 "본인에게 상주하기 전에 반드시 곽광에게 먼저 상의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곽광에게 실권자의 지위를 인정한 것이다. 이로 인해 선제 즉위 초기에는 심각한 권력 갈등은 없었다.
사단은 곽광의 처인 곽현의 욕심에서 태동했다. 곽현은 미천한 신분 출신으로 욕심 많은 여자였다.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들기 위해 선제의 조강지처인 허황후를 독살했다. 선제는 매우 총명한 황제였다. 자신의 처가 죽은 것은 곽광 일족의 음모임을 꿰뚫어보고 후일의 보복을 마음에 담았다. 허황후가 낳은 아들을 황태자로 삼으니 후일의 원제다. BC 68년 곽광이 병사하자 선제는 곽씨 일족의 군권을 박탈하고 지방으로 좌천하여 권력의 중심에서 배제했다. 궁지에 몰린 곽씨 세력의 반란은 사전에 감지돼 일족은 주살되고 선제의 권력은 공고해졌다.
선제는 오랜 기간 민간에서 자라 백성의 고통과 애환을 잘 알고 있었다. 민생의 어려움과 현실 세계의 각박함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 인간이었다. 선제는 패도와 왕도를 섞어서 펴야만 한다는 실용주의적 통치관을 갖고 있었다. 지나친 유교적 이상론으로는 국정의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없다는 냉정한 현실주의 계산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무제와 소제의 시기를 거치면서 치안이 흐트러졌고 변경의 방어 체계도 약화되었다. 무엇보다도 관료사회 분위기가 많이 이완되었다. 선제는 질서유지와 공직기강 확립을 위해 엄격한 법치주의로 국정에 임했다. 선제 시대의 형벌은 엄격했다. 법가계통의 관리를 중용했고 법 집행이 가혹해졌다. 황태자는 유학자를 등용할 것을 권유했지만 선제는 "아직은 때가 이르다"며 수용치 않았다. 철저한 법가주의적 통치방식을 밀어붙인 것이다. 이에 따라 선제의 23년간 치세는 흐트러진 민심과 사회질서를 회복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무제의 빈번한 외정으로 국력의 피폐와 백성의 고초를 직접 목격한 선제는 '휴식'의 시대를 지향했다. 군사 행동은 최소화했다. 한나라에 복속했던 신장 지역의 차사국이 등을 돌리자 군대를 보내 점령했다. 오랜 두통거리인 흉노 세력이 선제 때에 이르러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BC 51년 흉노의 호한사선우가 장안에 입조해 스스로 신하되기를 청했다. 서역 지역이 완전히 한제국의 판도에 귀속되었다. 서역도호가 설치되고 서역으로의 교역이 활성화되었다.
선제는 전한 중흥의 황제다. 그러나 내조 중심의 통치로 행정부 격인 외조가 약화되었다. 외척과 환관의 발호를 초래했고, 왕망의 난으로 전한이 멸망하는 계기가 됐다.
박종구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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