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로 본 정조, 광해, 정도전의 지도력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지금 이 순간, 우리가 원하는 리더십은 무엇인가. 지난 6·4 지방선거의 결과는 정부 리더십에 대한 경고로 해석되지만, 여전히 많은 '리더'들은 사람들이 정확하게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리더십이 쏟아져 나와도, 대중들의 마음을 속 시원하게 긁어주기에는 역부족이다. 더군다나 오해와 불신만을 불러일으키는 '불통'마저 리더십의 한 종류로 버젓이 내세우고 있는 게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하지만 힌트는 의외로 가까운 데 있다. 대중문화는 사람들의 욕구와 결핍을 파악할 수 있는 바로미터다. 대중문화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지금의 대중들이 열광하는 리더십이 어떤 모습인지 보다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다.
내 백성이 가장 소중하다...이상적 리더십의 '광해'
가장 대표적인 예로 2012년 '광해 신드롬'을 들 수 있다. 연말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가 개봉했다. 영화는 조선 광해군 8년, 독살 위기에 놓인 왕을 대신해 가짜 왕 노릇을 하게 된 천민 '하선'과 그 주변 이야기를 때론 코믹하게, 때론 진지하게 다뤘다. 하지만 이 영화가 대선 특수를 타고 '1000만 영화'가 될 것이라고는 영화계에서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업계 예상 성적은 500만~600만 관객이었지만 '광해'는 이보다 두 배가 넘는 1231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영화의 흥행은 당시 '광해'가 보여준 이상적 리더십에 대한 대중들의 열망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보여준다. 비록 가짜 왕이지만 천민 하선은 "가진 자가 더 내야 하는 것 아니오"라며 기득권 세력에 대해 분노하고, 광해는 대동법 시행에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땅 열 마지를 가진 이에게 쌀 열섬을 받고 땅 한마지기를 가진 이에게 쌀 한섬을 받겠다는 게 그게 차별이요?"라고 응수한다. 대동법 개혁 논쟁에서 과감하게 백성의 편에 선 왕의 모습이 21세기 관객들의 눈에도 인상적이다. 특히 광해가 명(明)에 대한 예를 지키라는 요구에 "그대들이 죽고 못사는 사대의 예보다 나에겐 내 나라 내 백성이 열갑절, 백갑절은 더 중요하다"고 일갈하는 대사는 대중들이 정부로부터 듣고 싶은 말을 대신한다.
'백성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광해가 보여준 민본(民本) 정치는 무릇 지도자라면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에 대해 당시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오히려 광해 혹은 광해를 대신한 가짜 왕의 대사와 행동은 너무나 도덕적이고 상식적이어서 리더십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인데, 대중들은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이런 상식조차 지키지 못한 정치권에 대한 환멸과 실망감을 영화를 통해 위로받았다. 사사건건 백성의 편에 서서 신하들과 대립하는 개혁군주 '광해'의 모습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낀 이들은 '정치인들이 꼭 봐야 하는 영화'로 '광해'를 손꼽기도 했다.
난세의 시대, 정의와 개혁의 리더십 '정도전'
'광해' 이후 2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정권은 교체됐고, 어느덧 박근혜 정부는 집권 2년차를 맞았다. 세월호 참사가 전 국민의 가슴에 생채기를 남겼고, 6.4 지방선거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정도전 신드롬'이 일었다. 올 초부터 KBS 1TV에서 방영되고 있는 사극 '정도전'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던 혼란의 시기를 살다 간 정도전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 시대에 요구되는 리더상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제작진 역시 기획의도에서 현 상황을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할 정치가 오히려 한숨과 냉소의 대상이 되어가는 기막힌 세태"라고 진단하며 "그럼에도 정치는 계속 될 것이고, 우리는 정치에서 희망을 찾아야한다. 때문에 우리는 600여년 전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고자 했던 한 위대한 정치가의 삶을 영상으로 복원하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극중에서 정도전은 바람직한 리더십에 대해 직접 이야기한다. 왕이 갖춰야 할 덕목으로 "듣는 것, 참는 것, 품는 것"을 꼽은 정도전은 "조선은 임금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다. 조선에서의 임금은 만백성의 어버이, 백성 위에 군림할 뿐이다. 임금은 맡기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집정대신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조선을 대한민국으로, 임금을 대통령으로 바꾸어보아도 지금 국민들의 바람과 어긋나지 않는다. 또 사사건건 어깃장을 놓는 신하들에 대해 이성계가 불평을 늘어놓자, 정도전은 "신하의 소임은 간쟁하는 것이다. 군왕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것은 밥버러지이지, 제대로 된 신하가 아니다"라며 일침을 놓는다.
'정도전 열풍'에 대해 극중 정도전 역을 맡은 배우 조재현은 "시청자들이 지금의 정세를 극 중 난세와 비슷하게 느끼는 것 같다. 2014년 대한민국에 대한 불만, 지금과 같아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모두들 하고 있기 때문에 이 드라마를 단순히 사극만으로 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11년간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근무하며 오랜 시간 여의도 정치판을 직접 겪었던 정현민 작가의 작품이란 점에서도 '정도전'의 세계를 현실정치에 대입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권력층은 측량하기조차 힘든 땅을 갖고 있는데 백성은 송곳 하나 꽂을 땅이 없다"고 한탄하는 리더를 이 시대에 가질 수 없다는 점이 사람들을 TV앞으로 모이게 한 것은 아닐까.
"작은 것에도 정성을 기울이라" 정성과 포용의 리더십 '정조'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중용 23장)
영화 '역린'이 개봉하기 직전 세월호 참사가 터졌다. 단 한 명도 구조해내지 못한 정부의 무능과 무기력함에 국민들은 분노했고, 박근혜 대통령은 리더십 논란에 휩싸였다. 이런 상황에서 '역린'은 정조가 중용의 한 대목을 읽는 장면만으로도 화제가 됐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국민들이 정부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었다. 정말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구하려고 했는지, 실종자 구조보다 자신들의 안위만 우선한 것은 아닌지, 이 대목에서 많은 관객들이 초기 대응 부실 논란에 휩싸인 세월호 참사를 떠올렸다.
또 마침내 정유역변에서 살아남은 정조가 자신을 제거하려 했던 상대편을 받아들이는 장면에서도 그의 포용의 리더십을 찾아볼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암살 위협을 받았으며, 왕이 되고 나서도 늘 반대 세력에 시달려왔던 정조지만 그는 젊고 개혁적인 군주로서 '세상은 바뀐다'는 희망을 꺾지 않는다.
대중문화는 사회적 징후를 드러낸다. 대중들은 현실에서 느끼는 결핍을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채워 넣는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정도전이나 정조에 열광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정도전이나 정조와 같은 리더가 없기 때문이다. "백성이 중요하고 사직은 다음으로 중요하며 임금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존재(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라고 했던 맹자의 말은 정도전이 인용한 대사이기도 하다. "군주의 권위와 힘을 갖지 못한 자가 용상에 앉아 있다는 것은 모두에게 비극"이라는 말, 그리고 "힘없는 백성의 목숨을 지키는 것이 나라가 할 일"이라는 말은 지금의 정치권이 깊이 새겨들어야할 메시지다.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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